사춘기 아들은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나,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홀로 아이를 집에 두고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편할리 없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벌써 교복을 입는 중학생이 되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아직도 5살 무렵의 청개구리 어린이였다. 일만 하느라 많이 돌봐주지 못했던 미안함에 눈물이 났다. 오로지 집과 가게를 반복하며 오로지 아이를 위한, 아이의, 아이에 의한 인생을 살겠노라고, 그리 다짐하며 살아냈지만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나의 죄 같아서 아이한테 늘 미안했고 가슴 한편에 죄책감으로 깊이 자리 잡았다.
햇반을 몇 박스를 사두었고 김치, 김 등을 수북하게 쌓아놨다. 늘 바빴던 엄마 때문에 또래보다 더 많은 걸 해야만 했던 아이였으리라. 계란 프라이도 잘하고 심지어 김치찌개도 나보다 잘 끓인다. 물론 유튜브를 보고 호기심에 한두 번 정도한 게 끝이지만. 가끔 설거지도 해주고 안마도 해주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어렸음에도 의지가 되기도 하는 든든한 녀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는 무척이나 외로웠을 것이다.
내게 가끔 아이가 의지가 됐던 것처럼, 나는 아이한테 의지가 되는 엄마였을까...
초등학교 5학년때 아들이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등교를 거부했고, 가출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책가방에 아끼는 만화책을 잔뜩 넣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학교 상담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그동안 전화로든, 방문해서든 상담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담 선생님은 이러한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시고 아들한테 끌려가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다. 달래고 매달려서라도 잡는 방법을 택하고 싶었지만, 나는 상담 선생님의 조언대로 강하게 대응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아들이 신발을 갈아 신고 막 나가려는 모습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마음이 강하지 못한 탓에, 늘 감정이 우선하는 탓에, 동정심이 유별난 탓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너 때문에 키우게 된 녀석이니까 나갈 거면 같이 나가.
어떻게 그 찰나의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포리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포리의 궁둥짝을 발로 밀어버렸다. 평화롭게 있다가 나한테 봉변을 당한 포리는 장난인 줄 아는 건지 그저 해맑게 웃기만 했다. 아들은 작은 한숨과 함께 강아지 포리의 목줄을 쥐어 잡고 호기롭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직은 세상을 모르는 고작 12세의 남자아이지만, 개념이 없기 때문에 멋모르고 더 겁 없이 행동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포리와 함께 나갔으니 어디 멀리 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불안함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빨리 뛰어 댔지만, 이상하게 숨이 턱턱 막혀왔다.
고작 가출을 한 곳은 아래층 계단이었다. 강아지 포리와 함께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몰래 확인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음이 났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집으로 돌아와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계단에 숨어 있는 아들을 경찰이 발견하여 가출소년이라는 명목하에 경찰서로 연행했고 나는 보호자라는 신분으로 아들을 데리러 갔다. 이 모든 것은 경찰분들과 나의 합동작전이었다.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경찰분들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신 덕분에 아들은 그다음 날부터 결석은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아들은 모르고 있다. 잘한 일이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때 도움을 주셨던 경찰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때의 상황에서 과연, 내 선택은 최선이었을까?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까?
아니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좀 더 이해해 주고 들어줬을 것이다. 좀 더 기다려주고 믿어줬을 것이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줬을 것이다. 나는 왜 그때 아이의 마음을 좀 더 채워주지 못했을까. 왜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나는 훨씬 더 철이 없었기 때문에 엄마로서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했고 올바르게 돌봐주지 못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후회는 늘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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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둘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대전으로 내려왔고 카페를 하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스무디도 마음껏 만들어주고자 했다. 물론 나의 주식과도 같은 커피를 더 마음껏 먹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내가 암에 걸렸다. 아이도 26에 출산하였고 모유수유도 2년을 넘게 하였으며 유방암으로는 가족력도 없는데 말이다.
인생은 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기상청에서는 비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인생에 정해진 것은 없으며 우리는 그저 가늠만 할 뿐이다. 수많은 변수와 고비에 부딪히면서 멈추고 좌절하게 되지만, 누군가는 포기를 할 것이고 누군가는 기어이 극복해 낼 것이다. 포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포기가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그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한 단계 더 성장을 한다. 신조차 완벽하지 않건만, 하물며 인간일진대 성장에는 끝이 없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그런데 그 성장을 나는 왜 암을 통해서 해야 하는 걸까.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일은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암'은 도저히 극복이 잘 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고 방사선 치료까지. 내가 만들어 놓은 나의 인생버스에서 강제하차를 당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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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실에 입원을 했다. 차마 1인실은 병실료가 부담되어 잡을 수 없었다. 6인실과 4인실 모두 환자가 꽉 찬 상태라 2인실 또는 1인실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코로나가 너무나도 심각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는 절차도 까다로웠다. 코로나 검사를 하고 음성임을 확인한 후 24시간 이내에 입원이 가능했다. 얇고 기다란 면봉이 내 코를 순식간에 점령하여 식도까지 타고 내려오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 콧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이었다. 하늘에 별이 보였던 건.
입원을 하기가 이렇게도 힘들고 불편할 정도로 코로나가 심각한데, 어째서 6인실과 4인실 병실은 만실인 걸까. 환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걸까. 아니면 병실료, 돈인 걸까. 물론 그 당시에 환자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긴 하다. 병실이 없어서 항암환자들이 입원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중앙주사실에서 항암제만 맞고 돌아가야 했었으니까. 2인실과 1인실도 당일 퇴원 환자로 인해 딱 한 자리씩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왕지사 입원하게 된 거 1인실에서 좀 편하게 쉬는 마음으로 있고 싶기도 했지만, 언제나 내 소망은 현실을 이기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 건데, 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더라. 그래서 너무 보수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이기도 하다. 그 사실이 가끔은 나를 더 불행의 늪으로 밀어 넣기도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쉬이 고쳐지지는 않는다. 가끔은 허황될지라도 이상을 좇으며 나를 좀 내버려 두고 싶은데 40년의 습관을 생각만으로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용돈벌이를 했었다. 대한통운에서 찹쌀떡을 1개에 100원씩, 도매가로 떼 와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돌며 찹쌀떡~을 외쳤다. 1개에 200원, 3개를 사면 100원을 깎아주어 500원에 팔았다. 미리 예약을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는 갖고 싶었던 신발을 사고 양말을 사기도 했다.
문학소녀의 꿈을 가지고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도 학비를 벌기 위해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덕분에 강의시간마다 졸기 일쑤였고 간신히 F를 면해 졸업만 할 정도였다. 아르바이트와 학업 2가지를 모두 하다가는 둘 다 놓칠 것 같아 휴학을 하고 대전 MBC 사무 계약직으로 입사를 했던 적도 있지만, 그때 당시 최저시급이 2,100원이었던 터라, 4대 보험을 제외하고 받는 월급이 식대 포함 50만 원이었다. 교통비와 기본생활비, 점심 식권 등을 빼고 모을 수 있는 금액은 굉장히 적었고 1년 동안 전액을 모은다고 한들 1년 학비로는 부족했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웬만한 일반 직장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겠구나,를 깨달았던 게.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한 일은 실손보험에 가입하는 거였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너무 자주 아프셨기 때문에 막연하게나마 예상이 가능했다. 보험을 가입하고 해지하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는 엄마를 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보험만은 끝까지 끌고 가자,를 다짐했었다. 얄궂은 타이밍 때문에 암진단금이 나오는 생명보험 2개는 실효가 되었지만,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엄마, 아들을 포함하여 나까지 실비만큼은 모두 유지가 잘 되고 있었다. 다달이 나가는 보험료가 상당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난하므로 믿을 것은 보험뿐이었다. 현금이나 부동산 같은 유형자산은 아니지만, 보험도 자산이라고 믿었고 그 생각은 옳았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2인실에 입원하는 것도 내게는 꽤 큰 사치였다. 지금까지도 내가 명품가방이나 옷 등에 관심이 없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세뇌 덕분이다. 필요 없는 것을 사는 것이 내게는 사치이니 갖고 싶은 유혹을 나는 잘 참아내는 편이었다. 이런 나에게 2인실에 입원하는 일은 어쩌면 인생 최대의 사치였으리라.
너무나도 고요한 세상이었다. 아직 다른 침실의 환자가 입원하지 않아 잠시나마 2인실을 1인실처럼 쓸 수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원밖 풍경이 멋질 리 없었다. 오래된 건물들만이 즐비해 있고 딱히 뭐가 없었다. 다만 병원이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었고 그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으로 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파스텔톤의 차분한 하늘색에 뭉개 뭉개 하얀색 구름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언제였던가. 하늘을 올려다봤던 게. 늘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았지만 잠시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여유도 없이 살았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한 번 쳐다보고도 이렇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데 나는 어째서 손에 무언가를 쥐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며 살았을까. 하늘에서 강렬히 빛나고 있는 태양까지 보고 나니 누르고 있었던 감성이 스멀스멀 깨어나고 있는 듯했다. 감정 없이 살아 내려 억지로 누르며 살았던 열정 가득했던 나의 꿈도 문득 생각났다. 심장이 옅게 두근거렸다.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다른 환자가 입원을 했고 기가 쎄 보이는 노란 머리의 중년여성은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주사를 놓는 간호사가 실수를 하자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그야말로 환자의 갑질이었다. 역시나 행복은 짧았고 그 대가는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진짜 곤혹스러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들이었다.
장기화된 코로나로 학교는 정상등교가 어려웠고 계속해서 집에서 원격수업을 이어나가고 있던 터였다.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등교가 쉽지 않았을 거였기 때문에 차라리 다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 먹는 아들의 식사를 하루 세끼 챙겨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들은 끼니때마다 전화를 걸어왔다.
밥은?
고기는?
아들의 밥을 배달로나마 챙겨야 했기에, 나는 마음껏 아플 수조차 없었다. 배민이 아니었다면, 나는 입원 중 조퇴를 해서라도 아들의 밥을 챙겼어야 했으리라.
배달의 민족, 은 내 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