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함과 절망감에 말을 잃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3명 중 1명이 암이라고 했던가. 광고를 통해 지겹도록 듣긴 했어도 그게 나일 거라고는...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상황에 나는 그저 멍하게 굳어 있었다. 앞으로의 치료과정을 안내한다며 간호사가 나를 밖으로 잡아끌지 않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는지도. 억지로라도 꺼이꺼이 울고 싶었지만, 끝끝내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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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쯤 왔을까?
운이 나쁘면 100세까지 살아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80까지는 살 수 있겠지,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었다. 삶이든, 죽음이든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긴 해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긴 했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하고 불안한 인생이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착실히, 성실히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게 최선이었고 그런 과정이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반드시 행복과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열심히 걸었고 쉬지 않고 달렸다. 가끔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이 길이 맞는 걸까. 잘못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고 나에게는 지켜내야 할 아이가 있었으니. 뒤에서 나만 바라보고 쫓아오는 아이를 위해 나는 그저 나아가야만 했다.
20대를 정신없이 보내고 30대가 되었을 때, 어째서였을까...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고 생각했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기혼자로서. 더더욱이 미혼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고 세상의 배려와 이해에는 대가가 따랐다. 아이를 지켜내고자 발버둥을 쳤으나 나의 발악에 세상은 조금의 응원도 베풀어주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너무 몰랐고 무언가를 지키기에 너무나도 철이 없었다.
꿈이 있었으나 나의 현실은 그것을 쫓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작가라는 허황된 꿈은 마음의 여유가 넘쳐나는 사람들이나 갖는 직업이라 그리 합리화했다. 나의 현실에서는 당장의 결과가 나오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야 했으므로 나는 조건에 맞춰 직업을 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가졌던 직업들이 보험 회사, 카드 회사 정도였다. 시험도, 스펙도 필요 없었다. 열심히 하고자 만 한다면 누구나 입사가 가능한 그런 일이었다. 대부분 경력이 단절된 주부였다.
사람들 눈에 행복한 척 나를 포장해야 하는 상황들이 꽤나 불편했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많이 아는 체를 하며 어쭙잖은 위로와 조언을 퍼붓는 동료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위로를 가장한 어설픈 조언은 오히려 독이 된다. 서서히 퍼져 나가 결국에는 나를 병들게 했다. 자격지심인지 자존심인지 모르겠는 감정에 나는 괴로웠고 자존감은 한없이 떨어져 갔다.
미혼모가 뭐가 어때서.
당당하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져만 갔고 뾰족해져 갔다. 누군가의 시선에 주눅이 드는 내가 너무 싫었다. 나를 동정하듯, 또는 비난하듯 바라보는 그 시선에 도망치듯 대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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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인천에 터를 잡았다. 가진 돈은 임대아파트 보증금 3천만 원이 전부였지만, 나는 주류대출과 보험 약관대출, 신용대출, 카드론 등 1억 원이 넘는 대출을 일으켜 치킨집을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무모하다 못해 무식했던 깡다구였다. 그곳에서 그렇게 나는 햇수로 7년여 동안 자영업을 했다. 나의 30대가 인천 만수동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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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년간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하루를 쉬고 잃는 매출이 너무나도 아까워 나는 나를 채찍질했다. 밀려드는 치킨 주문에 잠시 화장실을 가는 그 수 분의 여유를 낼 수 없어 방광염이 걸리기도 했다.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의 고통을 기꺼이 즐기며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아이를 지키고자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새 나는 그렇게 돈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한테 엄마가 필요한 그 수많은 순간마다 나는 가게를 지키는 '사장'에 중독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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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마흔을 맞이하기 전인 서른아홉, 나는 물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구내염이 심해져 갔다. 중학생이 된 아이의 사춘기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그로 인한 스트레스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이는 나와의 대화를 거부했고 기어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학교를 가지 않았다. 결석일수는 늘어만 갔고 나의 스트레스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가게 문을 닫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일을 계속했다. 몸과 마음이 힘들어 죽겠음에도 도저히 자의로는 가게 문을 닫지 못하겠어서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좀 쓰러졌으면... 과로로든, 영양실조로든, 좀 쓰러져서 병원에 며칠 입원 좀 했으면... 그때 나의 체격은 165cm의 키에 몸무게는 45kg 정도였다. 볼품없는 몸매에 깡마른 체구여서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날아가겠다고, 우스갯소리로 단골손님들이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180도의 튀김기에 실수로 손을 담갔음에도, 아르바이트생들의 잦은 무단결근에 주방과 홀 모두 혼자 감당해 내는 날들이 숱하게 많았음에도, 하루 16시간을 가게에서 그렇게 일만 하며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않았음에도, 그럼에도 나의 몸은 강철인지, 고무인지, 다음날이면 멀쩡히 눈이 떠졌고 천근만근인 몸일지라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졌다.
처음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입안이 따가운 정도였다. 그저 피곤해서 입병이 난 정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물도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입 안이 터지고 헐어서 종내에는 말을 할 수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면 어금니에 살이 닿는 그 고통이란. 그 끔찍한 아픔은 가히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으리라...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아 약처방을 받아 몇 주 동안을 먹었으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입안의 헌 부위를 긁어 소독을 하는데 나는 도저히 비명을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대기 환자도 많고 어린아이도 많았으나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눈물 콧물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그렇게 했는데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나는 그냥 커피로 연명하며 거의 음식을 먹지 않고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을 버텼다. 그게 암의 전조증상이었을 줄이야... 나는 왜 그렇게도 나한테 무심했을까... 나는 왜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까...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답답함에 하늘이 도왔을까. 적당한 권리금에 가게를 정리했다. 가게를 놓기까지 그리 오랜 고민하진 않았다. 한 부동산 소장님으로부터 프랜차이즈 호프집을 하려는 사장님이 있는데, 잠깐 대화 좀 해보시겠느냐는 전화가 왔고 나는 앞치마를 벗어젖히고 부동산으로 향했다. 나이가 5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남성분이 권리금을 300만 원만 깎아달라고 하길래, 그럼 당장 계약서를 쓰시겠느냐 물었더니 그럽시다. 한 게 끝이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중대한 결정을 충동적으로 한다며 나를 힐난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 가게를 정리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너무 많은 계산을 하다 그 기회를 놓기도 했고 놓치기도 했었다. 맹수의 눈빛으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인근의 부동산 소장님들에게 30대의 여자인 나는 언제나 만만한 먹잇감이었으리라... 만족스러운 권리금이라면 가게를 정리할 생각이야 늘 있었지만, 언제나 그 만족의 기준이 문제였다. 매도자는 권리금을 많이 받고 싶고, 매수자는 권리금을 적게 주고 싶을 테니, 서로의 욕심에 타협이란 쉽지 않았다. 더 열심히 장사를 해 볼 요량으로 냉난방기도 대형평수용으로 교체를 하였고 낡은 주방그릇도 새것으로 바꾼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가게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전부이다. 코로나가 막 시작된 즈음이었고, 정부의 규제로 계속해서 영업에 제한이 있었던 때였다. 조류독감, 메르스 등등 언제나 고비는 많았고 그때처럼 지나갈 거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생각했다. 코로나가 그렇게 길어줄 줄은 아무도 몰랐고 자영업자들이 이렇게도 많은 피해를 입을 줄은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언하건대, 그때 만약 가게를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음... 아마도?!
워낙에 큰 빚을 일으켜 운영한 가게였기에 큰돈을 벌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건물주 부자 만들어주기, 은행 부자 만들어주기, 주류회사 부자 만들어주기, 세금으로 대한민국 부자 만들어주기 등 나 빼고 모두 부자를 만들어주는 일을 7년간 했으니 말이다. 자영업자로 지낸 기간과 상응하는 퇴직금 정도의 권리금을 받아 들고 나는 대전으로 돌아왔다. 인천에 계속 남을 것인가. 대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수십 번을 고민했으나, 결국 나는 아픈 기억이 많은 대전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것 역시도 하늘의 도움이었으리라.
인천에서 지낸 7년간, 나는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누군가 눈치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니 쉬고자 한다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쉴 수야 있었다. 그러나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일해야만 했다. 거의 매일 대출 상환 알림 문자에 시달렸기 때문에 늘 불안했고 초조했다. 혹 연체라도 하게 된다면, 나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때의 내게 가게는 전 재산이었으므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나는 기꺼이 나의 30대 전부를 바쳤다. 죽어라 일만 한 기억이 내 30대의 전부이다. 그런 내게 가게를 놓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움켜잡는 것만이 그것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내 손에 쥔 것이 폭탄인 줄도 모르고.
순간적인 판단력이었는지. 무언가에 씌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선택이었는지. 나는 불과 몇 분만에 가게를 정리해 버렸고 충동적으로 대전으로 내려와 버렸다. 이런 내 선택에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나의 아이였을 것이나, 그때의 나는 한 치 앞밖에 볼 줄 몰라서 아이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했다. 돈을 많이 벌면 아이한테 행복을 선물해 줄 수 있을 거라 그리 믿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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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길어졌고 많은 업종들이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나의 주식과도 같은 커피를 더 이상 돈을 주고 사 먹지 않기 위해 이사한 동네에 작은 카페를 인수했다. 가족사업으로 급히 가게를 정리한다는 전 사장님의 급처분으로 무권리로 인수했다. 운이 끝내주게 좋다고 생각했다. 커피 기기들과 인테리어, 비품들이 꽤나 쓸만했다. 아이와 둘이서 이전보다는 좀 더 시간도 많이 보내고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해왔던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겠지만, 낮과 밤이 바뀐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이 학교에서 엄마 뭐 하시니?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호프집하세요. 보다는 카페 하세요. 가 나을 것 같은 이유에서 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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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이었다. 내 몸을 더듬고 만져 볼 일이 얼마나 있으랴. 그것도 겨드랑이를 만져서 뭐가 있나 확인한 적은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아내는 중이었다. 물기를 닦아내려 무심코 뻗은 수건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뭐지? 왜 알이 있지?
왼쪽 겨드랑이에 커다란 알맹이가 만져졌다. 아프다거나 불편하다거나 하진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긴 했다.
설마, 가 항상 사람을 잡는다.
가볍게 꺼낸 겨드랑이 알맹이 발언에 친구가 팔딱 뛰며 병원을 권했다. 곧 40이지만, 결코 젊지 않다며. 검사를 해보라고 잔소리를 계속했다. 그간 건강검진을 해본 적이 없긴 했지만 나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굳이 카페 문을 잠깐 닫고 병원을 가야 되나. 고민했다. 카페를 준비하는 두 달여 동안 계속되는 구내염에 병원 한번 찾을 법도 했을 텐데, 집에서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 그리 믿고 백수다운 백수생활을 제대로 즐겼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시차가 쉬이 바뀌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밀렸던 드라마와 영화를 실컷 보고 잠도 지겹도록 자며 신나게 백수 생활을 만끽했다. 그때라도 건강검진을 한번 받았더라면... 아니, 실효된 보험 점검이라도 먼저 좀 했더라면...
다시 또 우연히 가게 된 병원에서 겨드랑이 관련해서 검사를 받게 되었고 총인지 주사인지 의심스러운 큼직한 기기가 내 겨드랑이를 네 번 찔러댔다. 엄청나게 아플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생각보다는 참을 만했다. 결과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걸릴 거라고 했으나 3일 만에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암이 의심스러우니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그렇게 나는 동네 의원에서 써 준 소견서를 들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비슷한 검사를 다시 또 반복했고 새로운 몇 가지 검사를 더 했다. 큰 스테이플러 같은 기기로 왼쪽 가슴 부근을 마구 찔러대는데... 아픔보다 소리의 공포가 더 심했다. 접수를 하고 기다렸다가 검사를 하고 결제를 한 후 다시 또 접수를 하여 기다렸다가 의사를 만나고. 와라, 가라, 기다려라, 가라, 와라. 똥개훈련을 받고 있는 듯하여 당장에라도 병원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나는 참기로 했다. 아쉬운 건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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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결과를 듣기로 한 날, 충남대학교병원 담당교수의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방암입니다. 겨드랑이까지 전이가 되었고 3기까진 아니고 2기 정도 되는 것 같네요.
컴퓨터에 쓰인 글자를 그대로 읽는 걸까. 어쩜 저렇게도 감정이 1도 느껴지지 않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걸까. 그래서인 걸까. 분명 충격이고 먹먹했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간호사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왔는데 여긴 병원일까. 시장통일까.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다 암환자란 말인가. 3명의 간호사 앞으로 줄줄이 사람들이 서 있고 대기석에는 거의 빼곡하게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이 전혀 시선에 들어오지 않았었건만, 이제는 이 사람들만 보였다. 의사도, 간호사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람들의 머리에 시선이 갔다. 모자를 썼지만 그 속이 느껴지는 민머리. 까만 혈색. 명품 가방을 멨지만 누가 봐도 환자처럼 보이는 그녀. 왠지 낯설지가 않게 느껴졌다. 물론 내게 명품가방은 없지만.
가장 빠른 수술날짜가 두 달 후라고 했다. 수술날짜를 잡을 건지, 아니면 다른 병원으로 갈 건지, 결정해 달라고 재촉했다. 나는 가장 빠른 날짜로 잡아달라고 요청했고 수술 전까지 받아야 하는 검사들에 대해 오래 얘기를 들었다. 한 뭉치의 진료용지를 받아 들고 나는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수술날짜를 잡고 나니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암이라니. 이 나이에 내가 암이라니... 인천에서 그렇게도 절실히 기도를 했을 때는 응답이 없더니,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나의 인생은 언제나 생각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지 않았으나, 암은 내게 불가항력적인 존재였기에 나는 어떤 대안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치료기간이 얼마가 걸리는지, 병원비는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없었고, 결국 나의 생각이 멈춘 종착지는 돈이었다. 대출을 풀로 받았어도 전세 보증금에 돈이 묶여 있고 역시나 카페 보증금에 돈이 묶여 있으니 통장 잔고는 거의 바닥이었다. 이제 막 오픈한 카페를 정리하는 게 맞았으나 시간이 빠듯했다. 더욱이 코로나는 점점 종식과 멀어져만 갔고 사회적 거리두기, 인원 제한 등 정부로부터의 각종 규제로 날이 갈수록 자영업자들의 폐업률이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카페를 오픈하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으나 가게를 다시 무권리로 내놓는다고 한들, 쉬이 빠질 것 같지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영업을 하든, 하지 않든, 월세와 전기세 등 월 고정비는 절대적이다. 거기에 전셋집 대출이자와 관리비 등 기본 생활비까지 합하면 치료를 받는 동안 파산신청을 해야 하는 건 아닐는지 고민과 스트레스가 커져갔다.
아. 뿔. 싸. 인천에서 가게를 정리하고 대전으로 내려와 백수생활에 정신줄을 놓은 그 몇 달 사이에 암보험이 실효가 돼버렸다. 2개의 생명사 모두 실효가 되어 암 보험금 1억 원이 날아갔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그 사실보다, 암 진단금 1억 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 더 원통해 나는 몇 날 며칠 잠을 설쳤다. 그렇게 받지 못하게 된 1억 원을 아까워하다 2달이 훌쩍 지났고 나는 가게를 정리하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까지 영혼을 불태워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