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진단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착한 암이라고 하더라. 3명 중에 1명이 암일 정도로 흔한 질병이 되었는데 그 세 명 중 한 명이 나인 거고, 어렵고 나쁜 많고 많은 암 중에 그나마 착한 암에 걸렸으니 다행이라고 하더라. 내가 꼬인 걸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착한 암이던, 못된 암이던, 그 분류를 왜 그들이 하는 걸까? 암에 걸렸는데 어째서 다행이라고 하는 걸까? 착한 암에 걸렸으니 오버하지 말라는 건가? 착한 암이니 암 같지도 않다는 건가? 나를 위로하려 고심해서 건네었을 그 말의 의도는 알겠으나, 위로를 위한 그 말은 예민한 나를 오히려 서운하게 했다.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그런 위로가 나는 필요했지만, 서른아홉의 암환자가 된 내 곁에서 그런 위로를 전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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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생을 잘못 산건가?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혼자라는 사실에 더없이 서글퍼졌다. 외롭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어쩌면 나는 늘 외로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에 빠지지 않으려고 지독하게 일에 집착했던 건지도. 외로움을 느껴할 그 찰나의 감정도 허락지 않으려 계속해서 나를 일에 빠뜨렸는지도.
만약에,
혹시라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그 순간 혼자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세상 혼자 왔으니 혼자 떠나야 함이 당연할 테지만, 그럼에도 혼자서 가기에는 너무 외로운 순간이지 않은가. 나와의 이별을 진심으로 슬퍼해 주고 나를 기억해 줄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리라.
자꾸만 커져가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카페에 나가 일을 했다. 감정을 쓰면 한없이 깊은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 도저히 스스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일을 했다. 수술 후, 항암 후, 회복기를 갖는 그 잠깐의 퇴원기간에도 나는 가발을 쓰고 카페에 나가 틈틈이 배달이라도 받았다. 물론 숨만 쉬어도 나가야 되는 지출의 무게가 어마어마했으니 현실의 무게가 더 크게 한몫했지만.
아파도 마음껏 아플 수 없는 게 내 현실.
쉬고 싶어도 마음껏 쉴 수 없는 게 내 현실.
가끔 삶이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의 아이를 위해서 차마 그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게 내 현실.
생각해 보면, 책임감으로 인생을 사는 나인지라 한 번이라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다. 유년시절의 나는 수동적인 아이였기 때문에 착한 아이 코스프레를 하며 선생님 또는 친구들한테 비칠 반듯해 보이는 나를 연기하며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인생을 책으로 배웠기 때문에 내가 읽은 책의 주제는 언제나 권선징악이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삶의 이치였다. 그러나 현실은 책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나는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악을 쓰며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내 인생은 나를 더욱 기만했고 농락했다. 불행하려 태어난 사람처럼 내 인생은 계속해서 꼬여만 갔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심하게 묶여버리는 실뭉치. 그게 딱 내 인생이었다. 종내에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질 않아 그냥 두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여 그대로 방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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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뭐지? 돈 주고 사는 건가?
그리하여 나는 그렇게 행복을 사려 열심히 돈을 벌려 일에 미쳤던 거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삶은 나를 농락했다. 암에 걸림으로써 내가 악착같이 쌓아놓은 나의 인생탑이 한방에 무너져 버렸으니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인생에서 이렇게 나를 두들겨 패고 괴롭히는 것을 사주에서는 '편관'이라고 하더라. 산 하나를 넘으면 더 큰 산이 나타나고 죽을힘을 다해 호랑이를 해치웠는데 사자가 나타나는 격이니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는데 그런 것을 사주 격국으로 따졌을 때 편관격이라고 하더라.
상황이나 환경적으로 굴곡이 많을 수밖에 없는 사주 육친, 편관.
인생살이 만만치 않은 글자, 편관.
내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져 사주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사주 용어 편관이기 때문이다. 나를 밀고 때리고 쓰러뜨리는 게 편관이지만, 엎어지고 쓰러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게 편관이기도 하다. 나는 암치료를 받는 동안 앞으로는 내가 무슨 일로써 먹고살아야 할까. 를 심히 고민했는데 그러다 본격적으로 사주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행복해지려 돈에만 집착하며 살다가 문득 내 인생이 궁금해졌고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인생살이가 덧없이 느껴졌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은 자살로써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막상 '죽음'을 곁에 두고 보니 삶도, 죽음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간절히, 살고 싶어졌다. 아직 해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너무 많았다. 이루고 싶었던 꿈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미성년자인 사춘기 아이를 두고서는 나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외면하는 것이 최선인 줄 알고 묻어두었던 내 가슴속 한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곪을 대로 곪아버린 상처는 썩어있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느껴져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책임감으로 인생을 살아냈다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니, 나 내 인생에 너무 무책임했더라. 엄마를 책임지고, 아들을 책임지고, 가게를 책임지고. 다른 모든 것을 책임지려 전전긍긍했으나 정작 스스로한테는 너무나도 무책임했다. 늦더라도 바로잡아야겠다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어떤 게 잘못됐는지를 따지기보다 이제라도 내가 나를 책임져야겠다 싶었다.
인생사 비극이라 생각하며 내 인생 절체절명의 위기인 줄 알았으나 내게는 완벽한 타이밍의 기회였으니 인생 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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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니 그냥 의사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하는 식은 내 몸한테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만큼의 전문지식을 갖출 수는 없겠지만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가입자가 가장 많은 유방암 관련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했다. 인생을 책으로, 사랑도 책으로 배우는 내게 유방암 책 구매 또한 필수였다. 항암을 하면 정확히 14일 즈음해서 한 움큼씩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고 하길래 가발도 미리 구매를 했다. 항암을 시작하면 두피가 너무나도 아플 것이기에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후에는 이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길래 삭발을 할 전용 미용실도 미리 알아봐 두었다. 항암을 하면 계속되는 구토와 메슥거림에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것이라고 하길래 식사대용식 음료도 미리 구매해 두었다.
유방암이 맞다는 진단을 받고 수술일까지의 두어 달 동안, 유방암수술을 위한 몇 가지 검사를 했었다. 그 최종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 담당의로부터 삼중음성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삼중음성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하필, 삼중음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방암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약 62세 정도지만 삼중음성 유방암은 40세 이하의 환자가 진단받을 확률이 더 높다.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당시의 내 나이가 39세였으니 나 역시 평균적인 통계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삼중음성유방암은 암세포에 에스트로겐 수용체, 프로게스테론 수용체, 사람 표피성장인자 수용체 2(HER2) 등 3가지 수용체가 없다. '수용체'란 특정물질과 결합해 특정 작용을 나타내는 물질인데 유방암세포가 3가지 수용체 중 1가지라도 양성이면 치료 방향을 잡을 수가 있으나 3가지 수용체가 다 없을 경우에는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다. 질병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공격적이기 때문에 다른 유방암보다 암세포의 성장, 분화가 빠르고 간, 뼈, 폐, 뇌로 전이가 잘 되어 초기에 치료해도 환자의 절반은 재발을 경험할 정도로 예후 또한 좋지 않다.
삼중음성 유방암에 대해 검색해 볼수록 불안감이 커져 갔다. 유방암이 착한 암이라더니 삼중음성유방암은 전혀 착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것이 100% 실감이 나지 않건만, 재발이 어쩌고 사망률이 어쩌고 하는 내용을 보니 두려움이 점점 커져만 갔다.
카페 건물주분이 큰 수술은 서울 큰 병원에서 하는 거라고 조언했다. 인터넷 카페에서 서울의 모 병원, 모 교수님이 유명하다는 추천글이 많아 그 병원에 예약 전화를 해봤지만 하필 병원 파업과 맞물려 진료를 보기까지 2개월이 넘는다고 했다. 진료를 보고 검사를 여러 개 하고 결과를 확인한 후, 수술 날짜를 잡으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릴 듯했다.
고민을 하긴 했다. 서울 병원으로 갈 것인지, 지방 대학병원에서 그냥 수술을 할 것인지. 상의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혼자서 대전에서 서울을 왔다 갔다 할 자신도 없었고 장기적으로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까지 받으려면 집과 가까운 곳이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다른 병원에 가서 한 번 더 검사를 받아봤는데 오진입니다,라고 의사가 말할 확률이 몇 % 나 되겠는가. 그리고 유방암은 수술 난이도가 높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빨리 수술을 받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는 나름대로 삼중음성 유방암에 대한 준비를 해나갔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다를 것이기에 나는 계속해서 삼중음성 유방암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내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 등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이를 테면 왼쪽 가슴 쪽에 통증이 있는지, 계속된 구내염은 증상이 어떤지, 백태 낀 혓바닥은 색깔이 어떻게 변하는지 등등. 그리고 아이친부한테 걸 소송을 준비했다.
3월 3일은 '삼중음성 유방암의 날'이다. 유방암을 상징하는 분홍색 리본이 3개 겹쳐있는 형태로 일반 유방암들과 다르게 표현한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3월 3일을 그저 '삼겹살 데이'로만 기억하지 말고 '삼중음성 유방암'의 날로도 기억해 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