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사임당 Jan 10. 2024

나 떨고 있냐?

근데 아니? 널 보면 항상 그렇다는 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함을, 왜적을 해치웠다.




주어진건 단 2시간. 상대도 모른 채 2시간 안에 결론을 내야 한다. 그 안에 승리해내야 한다. 아무도 모르게, 그러면서도 혼자 비장해 있다. 내게는 슈퍼맨처럼 지구 12 바퀴로 즉석에서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없다. 영화 <어바웃 타임> 속 팀처럼 선택한 시간으로 여행도 못 한다.


수학 선생님께 손바닥 맞으려고 기다리던 때처럼 느리게 갈 수도, 막 재운 아이의 낮잠 시간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까지 경험은 가능하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가끔 원하지 않아야만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원하지 않아야만 찾아오는 초능력. 하지만 그런 금단의 것을 원한다면? 흥, 택도 없다. 그런 일은 원하는 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언컨대 말이다.


무엇 때문에 떨고 있었더라? 왜 비장했지? 왜 2시간밖에 없었? 잠시 시간 여행을 하고 왔나 보다. 잊었다. 현재를.


여긴 교실이다. 내 앞에는 아름다운 D라인을 한 여인이 다정한 말투로 무언가를 격려 중이다. 아, 그렇다. 지금 드로잉 수업 중이었다. 층간 소음으로 집에 있는 것이 괴로움의 원천이라 물불 가리지 않고 뛰쳐나온 길이었다. 게다가 무료다. 드로잉은 준비물도 거의 없다. 연필과 지우개. 만원도 필요 없다. 스케치북까지 도서관에서 선물로 지급받았으니 너무 공짜다. 고맙네. 도피처에 도피자금까지 지급받다니 말이다. 휴, 2시간은 어쨌든 피신 가능이다.


선생님은 강렬한 인상과 다르게 목소리가 부드러웠고 커다란 눈 안에는 다독임도 들어있다. 부담은 내려놓고 조금씩 해 보자며 릴랙스를 외치고 있다. 해볼 생각도 안 한 명상을 하듯 호흡을 가다듬는다. 씁후후 씁후후. "자 손을 올리고 선을 그어 보세요. 이렇게요" 슥숙 휵숙 휘리릭 스으으윽 탁 뚝딱. 뭐야? 릴랙스 하라며? 언제 다 그린 거? 나는 어느 지점부터 어떻게 손을 착륙시켜서 어느 정도 강도로 연필을 마찰해야 해?


아차차 망.했.다. 그렇게 비장했건만.


10분. 20분. 30분 시간은 흐른다. 나는 30분 전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나 빼고 다른 사람에게만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나만 정지상태다. 왜 이런 거지? 왜 이렇게 된 거지? 뭐가 문제지? 잘 못 왔나? 또 초능력이 왔나?


다정한 선생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자각에 억지로 연필을 종이에 도킹한다. 어설프게 와있던 초능력을 살짝 물려본다. 이 넓은 스케치북 위 아무렇게나 해도 되지만 굳이 구석으로 도킹을 하고 있다.

손 근육에 입력 오류, 입력 오류.

도킹 도킹, 입력 오류 입력 오류.

삐삐삐 삑.

'시끄러워!' 혼자 속으로 화를 내본다.


"오호호호. 왜 이렇게 작게 그리세요? 그림은 잘 그리셨어요. 가운데에다가 조금만 더 크게 그려보세요."

'휴, 다정한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림이 왜 이따위야! 다시. 하며 기를 죽였으면 눈물을 옆으로 세운 채 <나는 선생님이 싫어요> 하면서 달려 나갔을 거다.'


주변을 둘러본다. 정지된 시간에서 돌아온 나와 달리 수강생들은 차근차근 시간과 함께 흐르고 있었구나. 지우개로 지우는 사람, 거의 다 그렸는지 스케치북을 들고 먼 눈을 하는 사람, 크로키를 하듯 거칠게 쓱쓱 해치우는 사람, 섬세하게 스케치북을 연필로 파는 사람, 스케치북 속으로 들어가려는지 키스를 하려는지 고개를 갸웃해 가며 각도를 재는 사람 등등. 다양하게도 차근차근 자기식대로 가고 있다.


마칠 시간은 되어가는데 나만 이제 연필을 갖다 대었다. 좋아. 잘했어. 시작이 훌륭해. 시작했잖아. 자.. 또 선 하나 더 그어봐. 어. 잘했어. 또 또 그렇지. 와우~.  뭐야~ 이러기야? 대단해.

'아 지친다. 언제까지 연필 잡는 손에 칭찬 한 번, 연필을 스케치북에 붙였다고 칭찬 한번, 선 하나 그었다고 칭찬 한번 하면서 그려야 하냐. 피로감이 쓰나미급이다.' 그만두고 싶다. 그림 못 해 먹겠다.


"선생님(요즘 수업을 들으러 가면 학생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잘했어요. 선이 이뻐요. 남은 건 집에서 마저 해 보세요."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예술가인가 봅니다. 구도가 아주 제멋대로입니다.

오늘의 수업은 끝이 났다. 공개 장소에서 치러진 전쟁은 완패다. 진이 빠진다. 그림을 분명 좋아했던 거 같은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항상 꿈을 꾼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두려운지 모르겠네. 이건 그림을 그리거나 배우는 수업이 아니라 <극기 수업>이다. '극기'. 한 학기 교과서를 몽땅 신발주머니에 욱여넣고 팔이 빠지게 들고일어난 거 같다. 어깨가 어디까지 빠져있다.


두려움. 잘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내 취미를 막는구나. 무엇을 하든 이 두려움을 깨부수지 않는다면, 못 부순다면 안 되겠구나. 그림이 문제가 아니다. 항상 그랬으니까. 너무도 하고 싶어 괴로웠던 것들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난 안 되는 사람이라는 낙인과 함께 잘 봉인했었다. 앞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듯 산 내 인생이 두려움 때문인 것만 같다. 나를 읽어서 이해하게 되면 앞이든 뒤든 갈 수 있을 거다. 그래 한 번 보자. 나라는 교과서. 교과서만 잘 보면 서울대 간다잖은가. 나는 미대 갈 거니까. 해 보는 거다.


나 있잖아. 이제 두려움에 벌벌 면서 악몽이나 꾸는 삶 그만 살란다.

도저히 수업 시간 내도록 선 하나 긋고 벌벌 떠는 게 싫어서 해 봤습니다. 유튜브에 좋아하는 성시경 노래를 틀고요. 거기에 나오는 15초마다 바뀌는 사진을 따라 그렸습니다. 15초 안에 완성한다. 잘? 노노! 완성!! 막 그림 완성이 도전 과제입니다.

보이는 걸 그냥 그린다. 잘 그리려는 욕심이나 생각을 끼우지 말고 습관적으로 해 보자!

그냥 손이 그리게 해 보자.

아무도 안 본다. 점수로 매기지도 않는다.

안 닮아도 된다. 기계적으로.

쓱쓱 그냥 그려라.

짧은 시간 생각을 지우고 그림을 그리자.

그렇게 일단 그리는 연습 후 조금 더 상세하게 그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제법 선이 나옵니다. 단번에 누군지 알만한 그림이 되기도 했습니다. 모르기 어려운 사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노팅힐의 줄리아 로버츠와 영국 출신 슈퍼 모델. 이름을 잊었네요)

이렇게 혼자서 그리며 두려움 퇴치를 해 보았습니다.

수업 시간에 한 회에 한 그림씩 하던 결과물.

그렇게 연습 후 수업 시간에 연필과 스케치북의 도킹이 조금 수월해졌습니다.

아직 이게 뭔가 싶긴 해도 그렸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잘 안 되는 건 다시 연습해 가면서..

마지막 드로잉 수업. 잘했다. 수고했다.

좋은 그림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야. 기억해.



아무도 말리지 마라. 






 '나 이제 전진 할래!!'

(22년도 도서관에서 무료로 들었던 수업입니다. 한 회 2시간 10번으로 무료 드로잉 수업은 끝이 났습니다. 두렵고 무서운 감정을 약간은 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쉽게 안 되긴 했는데 아직도 그림을 그리는 걸 보면 '두려움에 무릎을 꿇은 건 아니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식물적 낙관 (김금희 산문) 가운데 한 문단을 적어 봅니다.

어떻게 식물을 잘 기를 수 있어요? 하고 물으면 많은 그린 핑거스들은 일단 많이 죽여봐야 해요.라는 냉철하지만 어쩐지 섬뜩한 답을 내놓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거기에 식물 대신 무엇을 넣어도 우리가 납득할 만한 문장이 된다. 어떻게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일단 많이 망쳐봐야 해요. 어떻게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어요? 일단 싸우고 안 보기도 해봐야 해요. 그렇게 실패를 독려하는 문장들.

p.165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패의 경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요.


다음 회는 원근이나 투시가 뭔지 몰라 독학 한 사연과 책 소개 하겠습니다.

펜 드로잉도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날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스타그램에 매일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이전 03화 그래서 언제 할 건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