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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Jan 03. 2024

그래서 언제 할 건데?

아니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냐?

소심한 사람을 압니다.



수도권우유를 살까 두 개 붙은 조금 더 싼 지방우유를 살까 고민하는 사람을 압니다. 오늘 입고 나온 옷이 마음에 안 들어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사람을 압니다.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등'을 한 사람요. 목소리 큰 사람을 만나면 일단 거부감부터 드는 사람을 압니다. 귀가 타는 사람입니다. 이직을 위해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을 압니다. '공부를 해야 해' 맘을 정해 놓고 자신 없어 시작도 못하는 사람을 압니다. 모르는 길은 잘 가지 않는 사람을 압니다. 외국 이민도 아니고 해외여행을 갈까 말까 27번 고민하다 가기로 해 놓고는 어느 나라 갈지 또 고민하느라 몇 년 보내는 사람도요.

누굴게요?


예. 맞아요.


아니오. 그게 다가 아니에요.


예 접니다. 그렇긴 한데요.

아니요. 저만인 게 아니라요. 당신까지인 것도 압니다.


'세상 마을'에 가면 저는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어야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까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어야 진영논리가 사라질까 하듯 고민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고요. 말 한마디 해 놓고 실수했나 싶어 후회하기 바쁜 사람. 말하는 것보다 수습에 더 시간이 걸리는 사람입니다. 이걸 하는 게 좋겠다 정해놓고도 잘하지 못할까 봐 문 손잡이도 못 잡고 그 앞만 108번째 도는 사람입니다. 남편에게서도 "이상해, 정상이 아니야"소리가 불현듯 튀어나오고요. 취미를 공유하는 분들에게서도 "또 소심하게 군다"는 소리를 매번 듣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 이상한 건 말이죠.

'작가님들 마을'에 오면요. 무언가 다릅니다. 제법 많은 분들에게서 저와 같은 증상을 봅니다. 섬세하다 못해 소심하고요. 예민하다 못해 강박으로 보입니다. 어 어 흉보는 거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만물에 섬세하고 예민해야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픔을 공감해야 들풀이 밟힌 기분을 알아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별한 연인의 슬픔에도 내 일인 양 무너져야 절절히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처음 만난 내 아이의 빨간 울음이 내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눈물 나는 감동임을 알 테니까요.

성격이 털털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술 먹고 훌훌 털 수 있는 사람이 혼자 끙끙대는 사람보다 더 우울할 가능성은 조금조금 더 낮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소심하고 예민하고 우울할 수도 있는, 속으로 파고드는 성향은 무언가가 보일 때까지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을까요? 그 속으로 침잠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뭐 거실 천장이라도 말입니다. 모두들 마음속에 천장에 바치는 시와 벽지에 바치는 시가 조정래작가의 태백산맥 원고만큼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말고입니다만 우리끼리라도 그렇다고 치자니까요. 아닐 거라는 생각은 넣어둬 넣어둬요.


마음은 책을 12권째 떼고 있습니다. 스케치, 펜화, 수채화, 유화, 색연필화, 오일 파스텔화, 어반 스케치, 꽃 그림, 바다 그림, 동물 그림까지 모두 다 뗐습니다. 그런데 아직 빙글빙글 그림의 언저리만 맴을 돕니다. 그림을 시작해도 될 만큼은 투시법도 알겠고요. 모든 그림은 원기둥, 육각형, 원 이런 모형의 변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데요. 빨강, 파랑, 노랑 세 가지 색으로 모든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대충은 알겠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할 줄 몰랐습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알게 된 분이에요. '중국에 가고 싶다' 생각을 했데요. 대학 때요. 그래서 교환학생으로 갔데요. 끝. 글쓰기를 배우고 싶었데요. 그래서 배우러 왔데요. 끝.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생각이 고민을 통하지 않고 번뇌를 생산하지 않고 하는 게요.

결혼을 하고 알게 된 분도 있어요. 성격이 맞지 않다 이혼을 해야겠다. 그래서 이혼을 했데요. 우리 아이들 큰 아버지.. 아이고 이건, 실행력 얘기를 하면서 예로 들기는 가슴 아픈 이야기이니 패스. 그럼에도 "축농증(급성 부비동염) 수술도 필요하다고요? 그럼 하겠습니다 선생님" 하면서 하고요. 가족들이 걱정하니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치아 수술도 "그래? 걱정돼?" 하더니 바로 행해요. 그런 행동력은 어떻게 나오는지 정말 신기했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차암 신기한 거예요. <할 거 있음=>그래서 함> 이게 되는 게 신통방통합니다.


제가 말입니다.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신다는 거 압니다.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이미 책으로 배운 내용을 손을 들어 찍어 그리면 되는데 말입니다. 색을 만들고요. 관찰한 사물을, 제 마음을 통과한 세상을 그리면 되는데요. 또 '얼음' 외친  친구 '얼음땡'으로 풀어만 주고 도망가듯이 물감이 든 팔레트만 열었다 닫고.. 도망만 치고 있습니다. 괜히 더 필요도 없는 펜화만 주야장천 하고 있습니다. 겉돌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도망 안 가요. 할 겁니다. 잘하고 싶어서 이러는 걸 아니까요. 잘하지 못할까 봐, 내가 나에게 실망할까 봐 쉬이 시작치 못하는 걸 아니까요. 다독이면서 할게요.


 '못 해도 돼. 한 발씩 가는 거야. 틀려야 배우지. 넘어져본 적 없는 천재가 오히려 끝까지 가지 못하는 거 봤잖아'


  넘어지고 실망하고 널브러지는 것도 잘하고 싶고 더 하고 싶기에 기운이 빠지는 거니까. 그죠? 제가 지금 그럴 겁니다. 그림은 그리고 싶은데 본질로 들어가길 망설이며 김을 빼고 있네요. (식은 밥 되는 거 아녀?)


앓는 소리 많이 했지만. 돌아서 가고는 있지만 어쨌든 출발은 했습니다. 돌면서 걸어보니 더 목적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루 이틀 늦으면 어때요. 헛됨은 없을 겁니다. 펜을 놓지 않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던져놓은 닻을 향합니다. 닻이 빠지기도 하는지는 몰라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천천히 조심스레 당기고 있으니까요. 두려운 마음 살살 달래가며요.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 그렸습니다. 크리스마스에도 1월 1일에도 그린 그림 공개!

어릴 적 종이와 연필만으로 끼적이고 놀던 때가 있었어요.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서도 책에 움직이는 그림이나 그리는 한심한 아이가 저였고요.

전화 통화하면서 잰탱글(수많은 선으로 반복 패턴을 만드는 힐링 선 그림)을 하던 저라고요. 젠탱글이 뭔지도 모르고 했지만요.

그러니 저는 선 그리는 것이 싫지 않습니다. 줄 긋기 많이 어렵지는 않아요.

그래서 쉽게 접근하려 펜화를 시작한지도 모르죠. 부담 없이  시작하고 싶어서 말이죠. 하지만 결국은 색을 칠해야 하고 보이는 것을 선택과 집중으로 간략화해야 하는 숙제가 있어요. 저는 있는 건 다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집착이 있어서 선택에 어려움이 있거든요. 그림에서 '관문'같은 거예요. <무얼 빼고 그려야 하는가?> 묘사는 쉽지만 내가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면. 부담입니다. 너무 어려워요. 그걸 해야 합니다.

이렇게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좋네요. 다가올 미래가 조금 두렵습니다. 제가 다닌 다닐 길들을 골목을 집들을, 선택하고 색을 입힐 때까지 배우고 익힐 수 있을 것인가?

최종 목적지는 제 발길 닿은 곳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책을 떼 보겠습니다. 오늘도 아장아장 걸음마 걸음 한 노 사임이었습니다.


펜화를 도와주는 책. <펜으로 그리는 사계절 꽃>책과 다이소에서 산 1,000원짜리 종이. 그리고 스테들러 6개 들이 피그먼트 펜(화방넷이니 미술용품점에서 8,00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펜입니다)

이렇게 빼기 편하게 모양도 잡힙니다.


지난주에 소개해드리려 한 책이 아직 컴백홈전이라.. 이어서 진행했습니다.

이전 02화 그림책을 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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