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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Dec 20. 2023

프롤로그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영정 화가가 될 뻔했다.




초등학 아니 국민학교 때였다. 언니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하여 나의 '모'였다. 첫 생리도 언니가 가르쳐주었다. 울고 있던 나를 다독이고 옷을 갈아입혀 학교를 보내준 것도 당연 언니다. 어머니는 문 밖 어딘가에 계셨을지도 모른다. 5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엄마가 우리들에겐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언마(언니엄마)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이후가 잘 그려지진 않는다.


중학생 때였으리라. 언니가 대학생이었으니. 6살이나 많은 언니는 친구를 만날 때도 모임에도 하다못해 나이트도 데리고 가 주었다. 워낙 노안이라 아무도 잡지 않은 건 무척이나 다행스럽지만.. 뭐 키가 165는 되었겠고 커트 머리에 섬머슴 같은 얼굴은 잔뜩 늙어 보였을 테니 학업에 찌든 졸업반 정도로 생각해 주었으리라 좋게 생각해 본다. 아주 좋게.. 성숙하였다..


매사에 멍하고 똑 부러진 맛도 없는 데다가 호불호를 당최 알 수도 없는 말 없는 동생이 걱정이 되었나 보다. 공부도 못하는데 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이 애가 커서 뭐가 되려나 앞 날이 캄캄했겠다. 가만히 동생을 쳐다본다. 하루 대부분을 방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다. 숙제는 없는지 눈만 뜨면 저러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뭘 종이에 그린다. 가만 생각하니 어릴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린 데다가 좋아도 하는 거 같다. 지가 박수근도 아닌데 종이만 있으면 자주 그리고 앉았다. 밖에서는 뛰어놀지도 않고 공터에서 나무 작대기로 뭐든 긋고 다닌다.


그래 그림, 그림을 가르쳐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언니는 어린 동생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싶다. 하지만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간 데다가 집에서 대학을 다니니 별로 돈이 들지 않는다. 크게 필요하지도 않아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으니 가진 돈이 없다. 학원을 보내라고 하기는 부담드리는 거 같고 동생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싫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보다 수화 동아리로 알게 된 장애인 단체니 자원봉사자들을 떠올린다. 맞다. 자원 봉사자 중에 영정 화가가 있었다. 그 사람에게 동생을 부탁해야겠다. 그렇게 나는 언니 손은 안 잡았지만 뒤를 따라 초량(부산) 어느 상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할머니 댁에서나 봤던 영정 그림이 붙어있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뜨뜻미지근이다. 나는 나대로 이유는 있었다.

그림을 모르는 내가 봐도 원근은 무시되어 있고 햇빛이 비치지도 않는데 그림은 요령 없이  밝기만 하고 얼굴색은 사람 같지 않은 뭐랄까. 시체에 화장한 얼굴 같다고 할까. 실물만큼 사실적이지도 창의성이 가미되어 예술적이지도 않은 그 그림에 적잖이 실망을 한 것 같다. 뭔가 보자마자 예술적으로 반하여 열정이 막을 수 없을 만큼 폭발이라도 하리라 기대한 건지. 그 후로 언니에게 더 이상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게 아닐까 한다.


영정 화가. 동생이 하겠다는 의사만 있었어도 밥 먹고 살 기술은 습득시켰을 텐데 언니는 언니대로 섭섭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이걸 배운다고 미대 갈 것 같은 기분이 안 들고 이상하게 '여상'(실업계 고등학교)이라도 가라는 소리처럼 실망만스러웠던 거 같다. 그렇게 빨리 철드는 학교 싫다. 그렇게 날아갔다. 그림 배울 단 한 번의 기회는.


지금 생각해 보면 흔하지 않은 영정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면 어떨까. 친일작가가 그린 이순신 영정 복원에도 참여하고 역시 친일 작가가 그렸던 논개 영정도 다시 그리는데 보탬이 되는 그런 길을 걸었다면. 그렇게까지 성공이나 했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런 게 아쉬워서 하는 소리만은 아니다.


결국 그림은 정규 과정이든 비정규 과정이든 배우지 못했고 그리는 작업은 언제나 내 맘속에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댄가. 로봇이 그림도 아니 예술이랍시고 창작도 하는 시대. 인간인 주제에 배우겠다는 마음만 먹는다면 책으로든 유튜브로든 뭐가 되었든 가능하지 않겠나? 잘 찾아보면 무료로 그림 가르쳐주는 수업도 가끔 있을 테고 아무리 무리를 해도 책 값이야 한 달에 기 만원이면 오케이다.


그럼에도 알고는 있다.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거.


전투기 비행사는 적을 물리치는 게 목적이지만 F-16을 몰기 위해 빠른 속도에서도 기절하지 않을 훈련을 거듭하여야 할 것이고, 자신의 존재와 만물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은 새벽 기상, 노동 그리고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깨달음들을 품어냈을 때만이 시작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부분이든 직접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들 말이다. 비교가 너무 거창하긴 했다. 인정한다. 그림을 시작한다니 선 긋기부터 시작일지도. 빨간색이 무언인지부터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림을 그려보자. 까짓 껏 못 할 이유 하나도 없다. 오늘부터 너랑 나랑 1일이다. 그저 죽기 전에 소원이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싶다. 그렇게까지 비장함을 뿌릴 것까지야.. 그만큼 열정이 '불타오르네' 상태임의 강조다.


그림씨, 초보를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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