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간암 누나 간병일기
담당 교수는 원발암인 간암을 막기 위해서 색전술부터 하기로 했고, 입원 날짜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간암에 대해 찾아보니까, 간은 통증을 느끼지 못해서 다른 암보다 늦은 상태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암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발병부위를 포함하여 상당 부분 절제하는 건데, 다른 부위로 전이가 되어버리면 대부분의 치료는 삶을 조금 연명하는 치료에 불과했다. 절제를 하더라도 완치보다는 5년 동안 추적검사 후 이상이 없는 상태를 관해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로, 암은 그런 병이었다.
늘 그렇듯 엄마랑 같이 절에도 다녀오고, 이마트에서 나중에 입을 부드러운 수면바지도 사고, 스타벅스에 들러서 맛있는 커피도 마셨다. 집에 오는 길은 상당히 오르막길인데, 누나가 많이 힘들어해서 내가 손을 잡아주거나 뒤에서 조금씩 밀어줬다. 그래도 힘들면 누나는 잠시 앉아서 쉬곤 했다. 옛날에 외할머니도 오르막길에서 힘들면 잠시 앉았다가 가셨는데. 힘들어서 잠시 앉아있는 누나 옆에, 나도 같이 앉아서 쉬곤 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엄마는 카메라에 담았었고.
누나가 어느 날은 이삭이 먹고 싶지만 혼자 다 못 먹을 것 같다고 고민하길래, 남은 건 내가 다 먹을 테니 시키라고 했었다. 참 맛있게 먹더라.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누나가 다 못 먹을 것 같다고, 다 못 쓸 것 같다고, 다 못 읽은 것 같다고 망설이던걸, 그냥 내가 다 마무리할 테니 고민하지 말고 하라고 했던 게 다행이었다. 그나마 후회가 덜 남더라. 그까짓 돈 평생 살아야 할 때나 중요하지,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뭘 그렇게 중요하겠나. 그리고 몇 백만 원도 아니고 고작 만원, 이만 원에 고민하는 누나가 너무 속상하고 안쓰러웠다.
어느새 색전술을 받기 위한 입원날짜가 되었고, 엄마와 아빠는 보호자로 힘들 것 같아서 내가 주 보호자로 같이 들어갔다. 누나가 많이 힘들어해서 택시를 타고 갔고, 택시를 타는 곳까지 아빠가 짐을 들고 마중을 나와줬다. 입원수속을 밟고 병동에 입원을 했는데, 당시 지식수준으로 생각했을 때, 당시 마음으로서는 마치 이 치료만 받으면 전부 끝날 것 같았다.
수술까지는 아니라서 그런지 식사가 나왔다. 사실 잘 기억은 안 나고, 찍어놨던 사진을 보며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다. 단지 내가 기억하는 건, 누나는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며 늘 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동생이 밥 거를까 봐 늘 걱정했었고. 보호자 식대가 꽤나 비쌌는데, 누나는 비싸다는 말 하지 말고 무조건 챙겨 먹으라고 말했다. 나는 누나가 웃는 게 좋아서 일부러라도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게 내가 누나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밤에 병실이 답답해서 잠시 밖에 나와 로비에서 산책도 하고, 엄마랑 아빠랑 걱정하지 말라고 영상통화도 짧게 했다. 돌아와서는 내일 시술을 위해 채혈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아침에 누나는 이동식 침대에 실려 나갔다. 나는 몰랐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여자친구는 그래서 누나가 치료하지 않고, 진통제를 먹으며 마지막을 보냈으면 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색전술은 빨리 끝났다. 문제는 누나가 색전술 이후로 계속 토를 했다는 사실이다. 밥도 못 먹고, 토만 계속했었다. 나중에는 초록색 토가 나오는데, 간호사에겐 큰일이 아닌 건지 별 말이 없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이익준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대학병원 의료진에겐 늘 보는 상황이지만, 당사자들에겐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고.
나중에 교수에게 들었을 때, 누나의 암 크기에 비해서는 항암제를 적게 넣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누나의 암은 워낙 큰 상황인지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많이 들어간 편이라서 조금 힘들 거란 말을 하더라. 그래서 누나가 유독 더 힘들어 보였던 걸까.
하루 종일 토하는 누나 옆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한 채 계속 지켜보기만 했었다. 다음날 오전에 교수 회진이 있었고, 퇴원해도 된다고 했지만 내가 너무 걱정되어서 하루만 더 있으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이대로 집에 갔다간 큰일 날 것 같았으니까. 교수는 알겠다며 다음 날 퇴원하라고 허락해 줬다.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그날 밤 누나는 갑자기 열이 났다.
그렇게 토를 해도 안 오던 당직의가, 누나가 열난다는 말에 바로 오더라.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사실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우리 누나만 괜찮게 해 주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혈액검사 후에 염증수치가 조금 높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항생제를 피하주사로 검사한 뒤에 해열제를 같이 투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에서는 정말 큰일 날 수 있었던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엔 몰랐다.
항암제를 투여하게 되면 백혈구의 숫자가 급감하는데, 이때 세균이 침투하면 세균을 잡아먹는 백혈구의 숫자가 적어 급속도로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균이 온몸에 퍼져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패혈증이라고 말하고, 패혈증의 초기 증세 중 하나가 열이라서 그렇게 민감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 다음날 우리는 퇴원했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는 누나를 반겼고, 누나도 집에 와서 무척 표정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누나는 색전술의 후유증인지,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었고, 계속 구토를 했다. 간이 부풀어서 위가 작아진 걸까, 아니면 소화효소가 부족하여 소화가 힘들었던 걸까. 누나는 약 먹는 것조차 힘들어했었다. 항구토제를 먹어도 토하는 경우도 있었고.
엄마는 계속 누나에게 잘 먹어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했고, 나는 그런 엄마에게 누나가 먹고 싶을 때 먹으라고 그냥 놔두란 말을 했다. 누나는 당시 미음 조금과 주로 새콤한 과일을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잘 먹어야 한다며 냄새가 나지 않는 전복을 삶아서 잘게 잘라줬고, 누나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힘겹게 먹었다가 토하기도 했었다.
어느 날은 누나가 족발을 먹고 싶다고 말을 하길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시켰다. 늘 시키던 곳에서 시켰는데, 다행히 누나는 냄새가 안 난다고 무척 맛있게 먹었다. 평소에도 막국수를 같이 곁들여 먹는 걸 좋아했는데 혹시라도 매울까 봐 양념을 조금만 넣어서 같이 줬다. 양념이 적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무척 맛있게 먹더라.
누나는 밤에 38도 근처까지 고열이 계속 됐었다. 퇴원 안내문에 38도가 넘으면 무조건 응급실을 방문하라고 적혀있었는데, 누나의 몸 상태로는 응급실을 가기가 정말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해열제를 먹어보고 그래도 열이 오르면 방문하기로 했었다.
시간이 금세 지나 어느덧 빼빼로 데이였다. 누나는 어차피 못 먹을 거라고 사 오지 말라고 했었지만, 나는 누나가 좋아하는 빼빼로를 굳이 굳이 사갔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1개씩 사갔더니, 누나는 내심 반기면서 받아가지고 머리맡에 놓더라. 조금이라도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먹지는 못했지만. 누나가 좋아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지.
내가 혹시라도 밖을 나가야 하면 누나의 상태를 보고 약속을 잡았고, 혹시라도 저녁쯤에 열이 오른다는 연락을 받으면, 황급히 들어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큰 일은 없었지만.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해서 여자친구랑 다투기도 했고, 내가 일찍 들어온 날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나는 눈치채고 내심 미안해했다.
누나는 원발암은 색전술로 막아놨는데, 척추에 전이된 전이암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상태라 굉장히 아파했다. 날개뼈 사이 척추에 전이됐었고, 암이 신경을 눌러서 오른쪽 어깨를 무척 아파했었다. 늘 누나는 어깨가 아파서 방문했던 정형외과에서, 일부러 말을 안 해준 것 아니냐며 화가 나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이 정도 크기였으면 보일법도 한데.. X-Ray로는 보이지 않는 게 맞는 걸까?
그래서 누나는 혼자 머리를 감는 게 힘들어서 처음에는 엄마에게 부탁을 했는데, 엄마의 손은 너무 거칠었다. 엄마랑은 늘 큰소리가 오고 가길래, 내가 시도해 봤는데 누나는 차라리 내가 낫다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머리를 말리는 것도 힘들어서 내가 대신 말려주는데, 처음에는 두피를 안 말리고 머리만 말린다고 혼났었다. 내가 평소에 여자의 머리를 말릴 일이 있어야 알지.. 누나는 처음엔 뭐라 하다가 나중엔 하나씩 하나씩 알려줬고, 나는 점점 누나의 머리를 잘 말리게 되었다.
이 당시 누나는 아직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나라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평소에 참고만 살았던 누나의 인내심이 한계를 맞이했었다. 누나는 나와 이야기하면서 늘 엄마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았고, 나는 애써 누나가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누나의 가장 행복한 기억인 해외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었다.
사실 누나가 엄마를 원망하는 말을 들어도 상관은 없다.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화를 내기보단 웃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었을 뿐. 누나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누나가 해외여행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이렇게 오랜 시간,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해외여행 이야기도 한계는 존재했다.
우리 집은 4층에 위치한 빌라였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누나는 밖을 나가기 힘들었고, 매일 누워서 보는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지겨웠다. 누나가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거실이었고,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는 누나를 위해, 늘 가족을 위해 요리하던 엄마는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았다.
누나,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치료하는 게 맞았을까? 여자친구 말대로 진통제를 먹어가면서 마지막에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게 맞았던 걸까? 그러면 나중에 치료라도 해볼 걸 하며 후회했었겠지? 그런데, 이건 아직 시작도 아니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