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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y 12. 2024

팔레스타인 번역서 관련 단상

9년 전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의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국내 발간된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 관련 도서(번역서 포함)를 읽었습니다.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이런 책들이 문제가 많아서 1차 사료까지 직접 연구해서 8년간 책을 썼고요.


며칠 전 오랜만에 광화문 교보에 들러서 그사이 출간된 도서들을 확인했습니다. 한국인 저서는 거의 없고 몇몇 번역서가 나왔네요. 그중에는 제 책에서 인용한 일란 파페의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도 있더군요. 한글번역 제목은 팔레스타인 비극사인데 왜 이렇게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책은 진작 번역이 됐어야 하는 책입니다. 저자인 일란 파페는 대표적인 친팔레스타인 학자 중 한 명이고 이 책은 팔레스타인 관련 전문서적 중에서는 그나마 쉬운 편입니다.(물론 그래도 어려워요!) 1948년 '인종청소'라는 대중이 관심 가질 만한 주제를 다루고요. 번역서 중 가장 추천합니다.


이번 전쟁 이후로 사람들 관심이 늘어나니까 요즘 외서 번역에 불이 붙은 듯합니다. 현재까지 3종의 번역서가 나왔네요. 그런데 이중 한 권이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팔 측 주장이 이렇고 이 측 주장이 이렇다고 하면서 '는 뭐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이 둘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아니, 모르면 말을 하지 말아야지. 명확하게 정답이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저런 식으로 적어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걸 본 독자는 정답이 없거나 없는 문제라고 오인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가해자의 죄가 감춰지게 됩니다.


이런 게 참 문제인 게... 번역하시는 분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잘 모르시니까 그저 해외에서 책이 판매된 실적과 저자의 명성만 보고 책을 선정합니다. 이 때문에 내용이 부실하거나 정치적으로 왜곡된 책들이 번역되곤 합니다. 비단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다른 주제 분야에서도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이지요.


정말로 심각한 문제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막을 방도는 없어 보입니다. 팔레스타인 글 쓰는 한국인 작가들도 오류가 무더기로 발견되는 실정인데, 번역가 분들이 책 내용의 진실을 판별할 만큼의 지식을 갖추시긴 어렵겠지요. 출판사는 말할 것도 없고요. 마음 같아선 번역하기 좋은 책을 제가 선별해서 추천하고 싶지만, 제가 읽은 책들은 전부 전문서적이라 번역하기도 어렵고 팔리지도 않는 것뿐이네요.


그래서 교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그냥 끄적여봤습니다...


여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책을 읽은 분들도 해외 학자들의 원서나 번역서를 여러 개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기본적으로 저보다는 해외 학자들이 당연히 아는 게 많고 더 전문적입니다. 다만, 제 책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가장 종합적이고 정밀하게 분석한 책이라 해외 원서보다 탁월한 점이 많다고 자평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직접 연구할 필요 없이 좋은 책 번역하고 끝냈겠지요.) 그래서 번역 수출까지 준비 중입니다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800쪽이라는 짧은 분량에 모든 걸 집어넣느라 대부분의 소주제를 요약식으로 적었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해외 학자들의 책(*)은 사건 하나하나를 상세히 파고듭니다.  그러니 제 책을 통해 큰 그림을 그린 다음 읽어보시면 내용 이해도 쉽고 재미도 느끼실 겁니다. 다만, 해외 유명 학자들의 책이라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이유로 일부러 왜곡하기도 하고, 잘 몰라서 틀리는 것도 있습니다. 책 한 권에서 자기가 전문적으로 연구한 내용은 대체로 10~30% 이내거든요. 그러니 책 읽다 보면 이렇게 유명한 학자들도 많이 틀리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틀린 내용 찾는 재미를 쏠쏠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기자가 쓴 책은 해외 서적이라 해도 전문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팔레스타인 관련해서는 아마도 유일한 예외가 Tom Segev일 겁니다.


틀린 내용을 어떻게 찾냐고요? 제 책이랑 비교해 보시면 됩니다. 뭐가 맞는지 판단하실 수 있도록 적은 책이니까요. 괜히 1차 사료를 연구하고 직접 인용을 많이 한 게 아니랍니다. 이걸 주제로 한 5년쯤 뒤에는 책도 한 권 내볼 생각입니다. 제목은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는가?>.


정말로 쓰고 싶은 내용이고, 굉장히 유익할 거라 생각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 왜곡 사례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고 제가 역사를 연구하며 겪었던 어려운 점을 소개하는 게 중심 내용입니다. 단순히 연도 기재 오류부터 시작해서 1차 사료를 꼼꼼히 검수하지 못해 생긴 사례, 정치적 이유로 왜곡한 사례, 편파적인 프레임 조성 사례 등등등 다양한 유형이 나올 겁니다. 이를 보면서 독자는 역사서로 접하는 내용이 사실이 아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역사에 대해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필요성을 깨우치게 될 겁니다. 실제로 제가 깨달은 것이기도 하고요.


이 깨달음이... 생각보다 크더군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한국인이 쓴 유명한 책을 읽고 있는데, 대학생 때는 그저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던 반면, 지금은 레벨이 높다 보니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모르는데도 어떤 내용이 타당한 근거 없이 작성되었는지, 의 여지가 있는지 등이 쉽게 보이네요. 너무나 당연하게도 표기 하나도 없는 글입니다. 그래서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 중입니다. 돈 아까워서 읽긴 하겠지만.... 하아....


요즘 사람들 책 안 읽는다고 뭐라 할 게 아니라, 작가와 출판사가 제대로 된 책을 내놓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냥 속설이나 피상적 지식만 조잡하게 엮어다가 유튜브랑 똑같은 수준으로 글을 적어 내면서 어떻게 남이 읽어주기를 기대합니까. 독서는 고등 문화고 우월하다 운운하며, 읽는 사람들을 깔보고 읽게 만들어야 한다고 소리치지만 마시고, 유튜브에서 전달할 수 없는 심층적인 지식과 지혜를 담은 책을 써내서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줍시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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