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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비

빗소리와 숨소리

by 글 써 보는 의사

온몸이 흔들렸다

가랑비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그렇게 땅이 흔들리는 줄


45년 만났던 모든 사람과 풍경의 무게가

지면과 충돌했다

빗방울 한 방울

저토록 땅을 흔드는지

가슴이 터져나갈 듯


잊었는가 누구나

태어날 때면 빗방울 하나쯤 떨어진다

엄마의 눈에서

사막 속 홀로 핀 꽃잎처럼 붉은

실핏줄 타고


다섯 살 둘째 아이가

처마 밑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에 담는다

까르르르

떨어지는 빗소리

더럽다 만지지 말라 속삭이는 내 마음

작은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담아내는 두 손 앞에

차마 꺼내지 못하고

대신 떠올린다


어린 시절 다리 없이 고무다라를 끌고 구걸하는 아저씨

가슴 아파 꼭 쥐던 백 원짜리 동전 두 개

주고 싶던 어린아이의 두 손

매몰차게 거둬들이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


이제 굳은살 박힌 내 두 손

빗방울 하나 묻지 않았다


어느새 가랑비는 소낙비 되고

뭐가 그리 신이 나서

바르르 떠는지

잎사귀들의 환희


두르륵 지붕을 두들기고

뚝 뚝 처마 끝에서 떨어지고

쪼르르 비탈진 콘크리트 따라 흐르고

무수한 빗방울 소리만큼

많은 것들이 태어나고

또 많은 것들이 죽어감을 안다

그 찬란한 오케스트라


모를 일이지 저 빗방울

아이에겐 행복한 첫 기억

내겐 행복한 마지막 기억

웃음이자 눈물

빗방울 한 방울마다 담긴 그 모든 사연


나도 가만

손 내밀어보네

빗소리인지 숨소리인지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온 지구를 뒤흔드는 저 소리









비 오는 날, 다섯 살 난 둘째 아이와 각자 손에 우산을 들고 밖을 나갔습니다.

기어이 한 손은 아빠 손을 잡겠다고 남은 손으로 우산을 들고 나가는 아이의 우산이, 유아용인데도 너무 큰지, 아이의 상반신을 쏙 감추고 걸음마다 위태위태 흔들거립니다.


비를 막을 수 있는 천장이 있는 곳마다 멈춰 서서 우산을 접습니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나

제가 먼저 빗방울을 손에 몇 방울 떨구자

아이는 호기심 어린 웃음끼를 만면에 띠더니 쪼르르

처마 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두 손 가득 담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저를 뒤돌아봅니다

까르르 웃으면서 말이지요


갑자기 가랑비가 소낙비로 바뀝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전율 비슷한 무엇을 느꼈습니다.

몇 초 사이에 가랑비가 소낙비로 바뀌는데

갑자기 눈앞에 모든 나무의 나뭇잎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온몸을 떠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습니다.

나뭇잎들은 말 그대로 환희로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들리지 않던 다른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두르륵 쓰레기 수거장 천장을 두들기는 빗소리

뚝뚝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콘크리트 바닥을 주르르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물소리

이따금 지나다니는 사람들 발소리, 차 지나는 소리까지

각각 다른 주파수와 리듬으로 소리를 내는데 이 모든 소리가

전혀 어수선하지 않고 참 조화로웠습니다.

말 그대로 오케스트라처럼요.


그리고 저와 아이는 그 속에서 같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 숨소리와 빗방울 소리가 똑같은 소리임을 느꼈습니다.

빗방울처럼 숨 쉬고 사는 게 삶이라고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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