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벌레 작가님 출판기념
책 속 문장 하나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물어보니 눈치 빠른 녀석이라 픽업을 기다리는 동안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고
일이 크게 번지지 않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여겼다 한다.
녀석은 열아홉이었다.
-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中 -
이 문장들이 마음에 와닿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감동하게 했을까?
(아, 참, 저 문장들이 무슨 의미인지 그 앞뒤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책을 통해 확인하시어요~^^)
아이는 때로 어른보다 어른스럽다. 그리고 그 어른스러움은 아이답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하자면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그 마음은 어른스러우나 그 동기가 아이답다는 말이다.
우리는 남을 배려할 때 순수하지 않다. 계산적이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지 않는다.
남이 나에게 대접해 주는 만큼 남을 대접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내가 조건 없이 그를 먼저 사랑하여, 결국 그도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만 나도 그를 사랑한다. (심지어는 그래도 사랑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먼저 믿고, 믿기 때문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이뤄졌기 때문에 믿는다. 보여야만 받아들인다.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조건 없는 마음.
특정 목표와 결과를 계산에 넣지 않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 행하는 행동.
나는 조건 없이 사랑하고 기뻐하고 울고 웃고 있나?
아이들의 그 조건 없는 사랑과 웃음처럼 나는 살고 있는가?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웃지 않는다.
어른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저 당장 아이로서 웃는다.
웃지만 웃음이 사라진 어른.
우리 아이의 해맑은 미소, 그리고
영화 속 반전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아이의 말들.
예를 들어, 내가 어디 부딪혔을 때, 5 살 꼬마 아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괜찮아?"
이런 순간들.
내가 놓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것들.
아이는 그렇게 세상을 본다.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한다.
아이의 눈으로 보면 무엇이든 어디서든 천국이 된다.
천국은 저 멀리 격리된 이상향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 내 눈앞에 있다.
다만 볼 수 있는 눈이 없을 뿐.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에는 그런 얘기가 나온다.
세상을 천국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 자들은 죽어서 천국의 문이 보여 그 문을 열고 천국으로 들어가고,
세상을 지옥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 이들은 죽어서 천국 문 따윈 보이지 않으며, 온통 지옥문만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천국 문, 지옥문은 애초에 둘 다 있다.
다만 보려 하기에 보이고, 보지 않으려 하기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지옥문을 쳐다보고 있는가? 천국 문을 쳐다보고 있는가?
아이는 언제나 내게 천국 문을 가리키고 있는데 왜 나는 그 손가락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되어 떨어진 것 같다.
계획에 없던 책 한 권 덕분에
눈물 같은 눈물을 간만에 흘려보냈다.
(삶은 언제나 예상대로 될 때보다 예상을 빗나갈 때, 확실성보다 불확실성을 통해, 더 많은 깨달음을 주지 않던가)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책 제목을 보고 내 머릿속에는 익숙한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이 고장난 걸까?
일단 책을 읽자, 하고 책을 집어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 경로를 빗나가고 말았다.
예상을 어긋난 길에서 그분이 등장하셨다.
(그분은 누군가는 뮤즈, 누군가는 영감, 누군가는 무의식, 누군가는 내 안의 나 등 다양한 용어로 쓰인다)
'나중에 물어보니 눈치 빠른 녀석이라 픽업을 기다리는 동안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고 일이 크게 번지지 않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여겼다 한다. 녀석은 열아홉이었다.'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마음은 이미 저 문장 외에 다른 무엇으로 글을 쓸 수가 없겠다고 단정해 버렸다.
마음이 결정을 내리자 생각은 따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왜 저 문장이 내게 눈물을 준 걸까?
그 과정이 자연스레 글로 이어졌다. (서툰 작가의 문장 공부랄까?)
그래서 그렇게 글을 쓰게 돼 버렸고 덕분에 무당벌레 작가님의 책 감상평이 아닌,
그저 한 문장 리뷰가 돼 버렸다 ^^;;; (죄송합니다 작가님 ㅎㅎ)
책의 인상은 일단 문체로부터 시작됐다.
문체는 사람으로 치자면 일종의 얼굴이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얼굴부터 보지 않는가? 첫인상의 90퍼센트도 얼굴이고.
작가님만의 개성이 실려 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서 프로란 이런 것이구나, 확 느꼈다.
애매모호하고 반복적이고 늘어지는(고해성사다, 내가 이렇다) 문장들, 혹은 서정성을 가장한 우울함이랄지, 깊이를 가장한 애매모호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널리스트를 거친 분들의 글쓰기는 불필요한 부분이 없다. 객관성과 주관성의 줄타기도 기가 막히게 해낸다. 시와 소설 같은 문학 장르만 읽는 사람들의 글쓰기는 대개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많다. 대신에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너무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이성으로 생각하기 전에 감성으로 먼저 행동하며 산다. 신경과학적으로도 이성과 관련된 신피질(neocortex)은 가장 나중에 생겼다.
그러나 이 책은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잡는다. 그리고 이 감성과 이성의 조합이 불필요한 단어의 배열 없이 효율적으로 나열된다. 그리고 작가님만의 고유한 감성이 담긴 표현과 단어들이 매 문단마다, 아니 거의 매 문장마다 줄지어 등장한다.
(헤밍웨이가 기자가 아니었었다면, 과연 그의 독보적인 스타일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내용 역시 알차다.
부자 관계의 심리적 갈등 분석을, 즉 이성적 영역을, 문학작품이라는 수단을 통해 달성함으로써 감성을 같이 끌어들여 설득력을 확보한다.
(논리학에서는 흔히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라 하지만, 실제 사는 현장에서는 감정이 가장 강력한 설득 수단이 된다. 사실 그리 보면 논리학 자체가 애초에 비현실적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님의 실제 사례이기에 따라오는 생동감은 플러스알파다. 읽으면서, 앞으로 커나갈 우리 아들 둘의 미래가 생생히 그려지는 듯했다. 그래서 조금 슬프기도 했다. (책을 보시라, 작가님의 사연을 읽다 보면 내가 왜 슬픈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일종의 예기불안, 아니, 예기슬픔이랄까 ㅎㅎ)
요약하면 이성 + 감성 + 생동감.
어, 이제 보니 책 제목 자체가 그렇다.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 서툰 아빠(생생한 사례)의 마음(감성) 공부(이성)'
덤으로 거의 매 문장마다 통찰이 깃들어 있는 건 안 비밀이다. 그러므로 문장 하나씩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은 독법이 되겠다.
(예: 대개 미워할 이유가 흐려져도 미워할 필요는 남는다)
그리고 원고소개서에서도 크게 배웠다.
기획 의도와 원고 소개는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책을 읽어 나가며 첫째 아이와 마주하게 될 사춘기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이제 초3인 아들 녀석이 벌써부터 반항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남일은 아닐 수 있겠구나, 막연한 생각들이 이 책을 보며 섬뜩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아니야, 나는 아닐 거야, 아니겠지? 아닐까?)
자, 그래서 그 모든 불안감이 그저 상상에 그치기를 바라며, 마치 주문을 외듯,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읽어 본다.
열아홉의 아이는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서 픽업을 기다리고 있을 터.
나는 오늘 그를-그리고 나 자신을 픽업하러 간다.
그래, 불안은 언제나 현재가 사라진 미래에서 온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을 바라보자.
(첫째와 둘째 아들은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언제나처럼 쿵쾅대며 귀를 어지럽힌다. 평상시였으면 소란스러웠을 그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린다. 주문의 효과인가? )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예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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