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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써 보는 의사 Nov 03. 2024

진심과 진리와 단어

월요일을 두 시간~ 앞에다~ 두고~


내일은 월요일이다.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면서 문득 '진심'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진심이 닿았다고, 진심은 통한다고. 정말 그럴까?  오늘은 진심과 관련해 떠오르고 이어지는 잡설을 늘어놔 보려고 한다.


진심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사전을 찾아보니

1.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

2.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

 

그렇다면 진심, 즉, 1.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은 과연 통할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듣고 싶은 진심만 진심이다. 진료를 보면서 많이 느꼈다. 사람들이 흔히 '그 사람은 진심이다.' 라고 할 때 진심의 기준은 그 진심을 발휘하는 자에게 있지 않고, 그 진심을 해석하는 자에게 있다.

병원을 찾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이렇게 하면 낫지 않는다고 당신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을 전하면, 무관심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싫어하거나 거부감 가지는 사람들이 그다음이고, 그 진심이 전해지는 사람은 소수이다. 이것이 그분들이 문제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심을 전달할 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수단에 있기 때문이다. 내 수단이 좋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저 지금 당장 무릎 통증만 없애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그 이유가 뭐고, 예를 들어 당신의 체증 증가 때문에 발생했고, 잘못된 운동 방식 때문이고, 하지 골반 정렬의 문제이고,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식의 진심을 늘어놔도, 그 사람에게는 잔소리일 뿐이다. 심하면 기분 나빠서 악플을 남기기도 한다. 자기는 무릎이 아파서 왔는데 뚱뚱하다고 인격 모독하고 이상한 골반 얘기만 하고 기분 나쁘다고 말이다. 그런 악플에 회의감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엔 내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 자신을 바꿔나가고 있다.


사실, 왕들도 그랬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간신의 말을 듣고 충신의 말을 듣지 않은 일이 허다하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만, 나라면 안 그럴 텐데, 왕이 참 멍청하네 생각하기도 하지만, 막상 병원을 운영하면서 보니 나도 마찬가지로 직원들의 충언을 듣기 어려움을 종종 깨닫는다. 간신의 말은 달콤하고 기분 좋고 충신의 말은 항상 기분 나쁘기 마련이다. 그리고 충신의 말이 '진심으로' 틀렸다고 생각될 때도 많다.

어쩔 수 없다.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선택한다. 아니야,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야 하는 사람조차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감정적이거나 본능적인 선택을 하고 뒤늦게 합리적인 설명을 늘어놓을 뿐이고, 자기가 그 설명을 정말로 믿고 착각에 빠질 뿐이다. 이건 나 혼자 얘기하는 뇌피셜이 아니라 심리학 분야에서도 오래전부터 얘기가 나왔던 바이고, 행동 경제학이나, '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와 같은 신경마케팅 관련 서적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마케팅에서 이미 닳고 닳을 만큼 써먹고 있는 중이고,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넘어가는 중이다.


자신이 이성적인 선택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정말로 사고의 힘으로 이성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대개 이성과 합리성을 선호하는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즉 자신의 성향에 끌려다닐 뿐이다. 

사실 정말로 이성적이라면 끝의 끝까지 의심을 해봐야 한다. 노벨상 과학 분야 수상자가 얘기했듯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 이성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는 일은 그만한 지적 능력과 굉장한 집중력과 의지를 요한다. 우리 같은 일반인은 그저 포장만 이성적인 수준에서 끝난다.

이성의 끝까지 집요하게 추적하면 결국에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도달하기 마련이고, 이때쯤에는 이성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이성적인 능력에서는 끝판왕인 천재적인 지성인들이 신비주의나 종교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성의 포기는 굉장한 용기를 요한다. 그렇기에 그것을 버릴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모를 뿐 과학이 발전하면 알게 될 것이다.' 혹은 게놈 프로젝트처럼 '앞으로 10년 뒤면 인간의 질병을 정복하게 될 겁니다.' 라는 식의 답을 내놓게 된다.


이때는 장자의 말처럼 배를 버려야 한다. 이성이라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면, 강을 건너 저 사막을 넘고 산을 넘어 더 전진하려면 배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배에 집착하면 그저 강가에 머무는 수밖에 없다.

진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도 그렇다. 자의식이라는 것이 참 요망한데, 자의식이 없으면 애초에 진리 탐구에 대한 욕구가 안 생긴다. 그 자의식이 그 사람을 상당한 깊이와 경지까지 이르도록 안내해 주지만,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결국 자의식마저 버려야 한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버려야 한다. 타고르의 희곡, 암실의 왕(어두운 방의 왕, the king of the dark chamber)도 그것을 나타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껏 자의식의 덕택에 여기까지 온 사람이 그것을 버리는 일은, 아니 버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갖는 것은 아주 어렵다. 흔히 말하는 인식의 전환이 '근본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이를 위한 수단들로서 언어적 사고 체계를 비트는 선문답이나, 언어 사용을 일절 끊고 사고를 정지하거나, 아니면 기행을 하는 방법 등 다양한 수행을 해볼 수도 있다. 구르지예프는 Beezelbub's Tales to His Grandson(베엘제붑이 손자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그런 시도를 했다고 밝혔다. (영문판으로 읽다가 포기했다. 번역판은 없는 것으로 안다. 관심 있는 분은 '구르지예프의 길'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구르지예프의 길을 처음 읽었을 때 소름이 돋았었다. 책을 읽다가 소름이 돋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번역자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얘기가 다른 데로 빠졌는데, 다시 '진심'으로 돌아가자면 결국 진심의 내용이 아니라, 그 표현 수단이나 형식에 따라 듣는 사람이 그것을 진심이냐 아니냐로 해석하고 감동하는 수가 많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수단이나 표현 형식, 또는 의식(종교나 행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에도, 사실 소설이 전달하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그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감동이 결정된다. 그것은 문체가 될 수도 있고, 생생한 캐릭터와 묘사가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다. 

간단히 예를 들면,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라'라는 말보다는 '오늘이 네 삶의 마지막 날인 듯 살아라'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그러나 둘은 같은 말이다. 후자가 표현을 더 맛깔나게 했을 뿐. 우리는 내용을 보고 감동한 것이 아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무런 수사나 꾸밈이 없는 평범한 말을, 또는 드라마틱하지 않은 흔해 빠진 일상을 스스로 감동하게 만드는 사람만이 꾸준히 열심히 잘 살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 해라'라는 평범한 말 자체를 깊이 깨닫고 체화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오늘이 네 삶의 마지막이다!!! 라는 말에 감동을 먹어도 결국 며칠 못 간다. 아무런 포장도 수식도 없는, 미사여구도 없는 말과 삶으로도 감동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마이클 조던처럼 사소한 사건으로도 승부욕을 불태우는 셀프 모티베이션의 달인이 되든지.


또 하나 진심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하나 내놓자면, 나는 진심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진심은 믿지 않는다. 내가 정의하는 진심은 반드시 '의지'를 동반한다. 그러나 대개 진심이라 말할 때 의지는 동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바람핀 여자친구가, 내 앞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 말을 믿어야 할까? 그 말이 진심인데 말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진심인데 한 번 받아줘." 그런데 사실, 여기서 말하는 진심은 충동과 감정덩어리에 불과하다. 알콜중독자가 술 마신 후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 하는 다짐처럼 말이다. 정말 '진심으로' 가슴속 깊이 술 마시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다음 날이면 한 모금 술 앞에 순식간 무너지는 진심. 그러므로 의지가 동반되지 않은 진심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지는 행동을 통해 보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할수록 통상적인 단어 사용이 망설여진다. 나만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할 단어가 사라져 가기도 하고(사실 어휘력의 부재 탓이 더 크지만), 동시에 단어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생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단어나 표현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가 생기기 시작하면, 어떤 말을 했을 때, 그 단어나 표현이 상대방의 경험 속에서 재해석되면서 개인적인 정의는 사라지거나 왜곡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한다는 의미-즉,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의미-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말은 최종적으로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의미를 결정한다. 그것은 내 의도와 진심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왜곡을 줄이려면 상대에 따라 단어와 문장을 가려 써야 한다. 그리고 말을 하면 할수록, 말하려는 의도가 추상적인 개념이나 진리에 가까울수록, 설명이 길어지면 더 왜곡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더 깊은 의미는 나는 철학자가 아니므로 모른다. 철학은 결국 언어로 사고하고, 진리는 언어를 벗어나 있으므로 말장난에 불과한 철학이 진리를 더욱 왜곡할 뿐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결국 말하지 않고 침묵할 때 진리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즐겨 썼다고 생각한다. 부처님도. 비유는 일견 모호하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과 직관으로 이해하게 해 주고, 듣는 이 각자의 수준에 따라 의미가 완전 달라진다.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면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진다. 진리는 설명문이 아니다. 느끼고 체험해야 하니까. 거기에 그나마 가까운 수단이 비유하거나 보여주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진리이다, 라는 표현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잘 쓴 시는 철학처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래서 시를 좋게 봤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깨달으려면 언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생각이 많을수록 오히려 말하기가 어려워지고 때로는 말하기가 싫어진다.



단어에 대해 예민해질수록

삶의 언저리를 보는 눈도 날카로워져

하루하루 시름은 늘어가고 

낙엽처럼 뒹구는 매미 몸뚱이에도 괴로움은 쌓여가고


또 다른 하루가 온다고

내일이 아닌 어제가 찾아온다고

무서워 아무도 찾지 않는 담벼락 뒤에 숨어

숨죽이며 보낸 어린 시간들아 


이제는 안녕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 못 올 님처럼 떠나보내련다

가끔씩 우릴 기억해 다오 

햇살에 이슬 반짝이듯

국민학교 책상 모서리에 새겨진 철 모르는 고백처럼 

잊지 말아 다오


............



그러므로 생각 많은 시간은 이제 접고, 움직이는 삶을 살아가는 내일을 그려본다. 

월요일은 말보다는 행동인 하루가 되기를.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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