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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태용 Nov 24. 2024

6화: 공명석의 주인

SF소설  《무의식、통제사회》

달빛이 청운동 산신각의 처마를 적셨다. 진해월이 향을 피우는 손이 떨렸다. 하진은 무녀의 주름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떨림 속에 그녀가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언제나 의연하던 그녀가, 오늘은 유난히 불안해 보였다.

무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윤희는 나즈라의 진실을 발견하기 전에 깨달았어. 우리 무당들이 수천 년간 지켜온 공명의 힘이... 그들 세계의 몰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하진은 가슴 한편이 저려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해월에게서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세계는 단순히 멸망한 게 아니야. 집단의식의 분열로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갔지. 개인의 의식이 극도로 분절되어 서로 공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의 창조성은 완전히 소멸했어. 마치 수천 개의 거울이 하나씩 깨져나가는 것처럼..."

진해월이 청동 거울을 들어 올렸다. 거울 표면의 문양들이 달빛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그 움직임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류는 달랐지.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꿈을 꾸고, 신화를 만들고,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해 냈다. 그들이 잃어버린 원초적 창조성을... 우리는 아직 간직하고 있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진은 진해월의 눈에서 깊은 연민을 보았다. 그것은 나즈라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서윤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작하겠습니다."

경쇠 소리가 울리자마자 산신각 위로 검은 실루엣들이 나타났다. 드론들이었다. 처음에는 세 대, 곧이어 다섯 대, 열 대로 늘어났다. 그들의 전자기장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향불이 흔들렸다.

하진의 손에 쥐어진 공명석 파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혈관 속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박였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깨어나는 것처럼.

첫 번째 환영이 밀려들었다. 달 뒤에 숨은 거대한 우주선. 석굴암을 닮은 표면에는 끝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만 년 전, 나즈라 문명의 찬란한 순간들. 그리고 서서히 찾아온 그들의 몰락.

우주선 내부가 보였다. 거대한 수면관 속에 잠든 나즈라의 마지막 생존자들. 그들의 창백한 피부는 반투명했고, 이마에는 미세한 균열이 가득했다. 마치 깨진 거울처럼.

드론들이 붉은빛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전자기 펄스가 산신각을 강타했다. 기둥이 흔들리고 서까래가 신음했다. 천장의 기와가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안돼... 공명석이..."
"네 안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어! 넌 단순한 실험체가 아니야. 네 피 속에 흐르는 건 그들의 설계가 아닌, 우리 자신의 의지야!"

하진은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했지만, 그는 공명석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순간 그의 혈관이 선명한 파랑으로 빛났다. 마치 별자리처럼 이어진 그 빛줄기는, 공명석의 문양과 똑같은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두 번째 환영이 쏟아졌다. 서윤희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공명석의 빛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하진 씨... 당신의 심장은 더 이상 그들의 실험체가 아니에요. 당신은 우리 무의식의 가능성을 그들에게 보여줄 창이에요. 당신 안에는 인류의 집단무의식과 나즈라의 지혜가 공존하고 있어요. 그걸 깨달았을 때... 저는 당신이 이 모든 것의 열쇠라는 걸 알았죠."

서윤희의 목소리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그들은 우리의 창조성을 복제하려 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요. 창조는... 자유로운 영혼에서만 피어나니까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내가 무시했던 그 비명이... 그녀의 마지막 경고였구나.' 하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내가 그녀의 뜻을 이어 그들과 맞서야 해.'

드론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붉은 전자기파가 산신각의 기둥을 갈랐다. 서까래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공명석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의 심장박동이 공명석의 진동과 일치하기 시작했다. DNA 속에 잠든 고대의 힘이 깨어났다. 두 개의 의식이 그의 내면에서 만나고 있었다.

순간 산신각 안의 공기가 진동했다. 하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드론의 붉은 전자기파와 충돌했다. 깨진 기와 조각들이 공중에서 멈췄다. 무너지던 기둥이 제자리를 찾았다.

진해월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네가 스스로 깨어나는구나."

마지막 환영이 펼쳐졌다. 나즈라의 우주선 내부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의 집단의식이 분열되는 순간, 수많은 거울이 동시에 깨져나가는 것처럼 그들의 정신이 산산조각 났다. 살아남은 자들은 마지막 희망을 찾아 지구로 왔다. 인류의 무의식이 가진 원초적 창조성, 그것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복제로는 안 돼요."
서윤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우리의 무의식은 야생화처럼 자라나는 거예요. 억압할수록, 통제할수록 더 강하게 피어나죠.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가진 이 자유로운 창조성을...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건 복제가 아닌, 공명이라는 것을..."

하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공명석의 진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빛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마치 은하수처럼 무수한 빛점들이 그의 몸 안에서 춤추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하진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들의 실험체로 만들어졌지만, 내 안에 흐르는 건 인류의 자유로운 의식이야. 서윤희 선배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그 가능성... 그리고 나즈라가 잃어버린 그 연결의 힘.'

드론들이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붉은 번개가 산신각을 강타했다. 기둥들이 완전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진은 진해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이제 불안은 사라지고 깊은 신뢰가 빛났다.

"두렵지 않다. 이제 두렵지 않아..."
진해월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윤희의 바람대로... 우리의 희망대로 자라주었으니... 이제 네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 진정한 공명이 무엇인지를..."

하진은 공명석을 높이 들어 올렸다. 푸른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드론들의 전자기파가 무력화되었다. 하늘에서 검은 실루엣들이 하나둘 떨어졌다. 산신각 주변의 공기가 진정되었다.

무너졌던 기둥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부서진 기와들이 스스로를 복구했다. 그것은 단순한 힘의 과시가 아닌, 창조적 에너지의 발현이었다. 하진은 이제 이해했다. 인류의 무의식이 가진 진정한 힘을.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하진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의 혈관을 흐르는 빛은 나즈라의 설계도 인류의 유산도 아닌, 그 자신의 것이었다.

산신각을 나서자 차가운 도시가 그를 맞이했다. 머리 위로 달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달 뒤의 거대한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우주선의 실루엣이 마치 고대 문양처럼 하늘에 새겨졌다. 그 표면의 균열들이 하진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깨어진 거울처럼, 하지만 이제 그는 그것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명석의 진동이 그의 심장박동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 울림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며 나선형의 빛을 그렸다. 순간 하진은 보았다. 인류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가능성의 물결을. 그리고 그 물결과 공명하기 시작한 나즈라 문명의 흔적들을.

하늘에서 새로운 별자리가 떠올랐다. 그것은 공명석의 문양과 같은 모양이었다. 하진의 혈관 속을 흐르는 빛도 같은 패턴을 그렸다. 세 개의 문양이 하나로 이어지며 거대한 나선을 만들어냈다.

"이제 시작이다."
하진이 중얼거렸다.
"우리의 진정한 각성이... 그리고 그들과의 새로운 공명이..."

동이 터오는 하늘에서, 나즈라의 우주선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것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의 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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