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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군사의 힘 (1784-1785년)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창덕궁의 밤이 깊었다. 연못에 달이 일렁였다. 정조는 서재에서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한양의 방어선이 그어져 있었다. 붉은 선과 푸른 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율은 정조의 곁에 서 있었다. 은빛 갑옷이 촛불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났다. 그의 눈동자가 지도 위를 훑었다.

"전하."

율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지금의 한양 방어 체계는 200년 전 설계된 것입니다."

정조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태조께서 한양을 정하신 이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허나 전쟁의 양상이 변했습니다."

율의 내면에서 데이터가 흘렀다. 미래의 전술 이론이 물결처럼 펼쳐졌다. 화약의 발달, 총기의 진화, 기동력의 중요성. 모든 것이 그의 의식 속에서 빛의 그물처럼 교차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정조의 질문에 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내부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미래 지식을 어디까지 공유할 것인가. 그 경계는 여전히 흐렸다.

"제가 본 전쟁들은..." 율이 말을 멈췄다. "다릅니다."

바람이 창을 흔들었다. 촛불이 깜빡였다. 그림자가 벽 위에서 춤을 추었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네가 본 전쟁이라니."

"전하, 장용영을 설치하십시오."

율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스며있었다.

"왕의 친위부대를?"

"그렇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호위 부대가 아닙니다."

율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그의 내면에서 전술 시뮬레이션이 가동되었다. 수백 가지 전투 상황이 0.3초 만에 연산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군대입니다. 기동력과 화력을 겸비한."

정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먼저 선발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율이 지도 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문벌이 아닌 실력으로. 시험을 통해."

"시험?"

"무예뿐만 아니라 전술, 지형 판독, 상황 대응력까지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정조의 눈이 반짝였다.

"흥미롭다."

율의 내부에서 또 다른 데이터 스트림이 활성화되었다. 군대 조직론, 지휘 체계, 보급선 관리. 미래의 군사학이 그의 의식을 채웠다.

"그리고 훈련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개별 기량보다는 팀워크를.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응을."

율이 지도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예를 들어, 적이 이곳으로 침입한다면..."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빠르고 정확했다.

"기존 방어선은 여기서 막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더 효과적인 것은..."

율의 손가락이 다른 경로를 그렸다.

"측면 기동을 통한 포위입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전술을 아는 장수가 있겠느냐."

"전하께서 기르시면 됩니다."

율의 목소리에 확신이 서려 있었다.

"장용영 장교들을 직접 교육하십시오. 새로운 전술서를 편찬하시고."

"전술서?"

"『무예도보통지』 같은."

정조가 놀란 눈으로 율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런 책 이름을 알고 있느냐."

율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내부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시간 개입 위험도 상승. 그러나 동시에 다른 신호도 감지되었다.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근본 명령.

"제가... 그런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반쪽 진실이었다.

정조는 오랫동안 율을 바라보았다. 촛불이 그들 사이에서 흔들렸다.

"좋다. 장용영을 설치하겠다."

율의 내부에서 안도감이 퍼졌다. 데이터가 아닌, 감정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런데 율아."

정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군대만으로는 나라가 바뀌지 않는다."

"전하?"

"법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따를 수 있는 명확한 법이."

정조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궁궐의 처마선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대전통편』을 편찬하려 한다."

"법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모든 법령을 체계화하여."

율의 내면에서 새로운 연산이 시작되었다. 법학 데이터베이스가 활성화되었다. 성문법 체계, 법 조문의 구조, 사법부의 독립성. 수많은 정보가 빛의 속도로 처리되었다.

"훌륭한 결정입니다."

"법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정조가 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깊었다.

율은 답을 고민했다. 데이터로 답할 수도 있었다. 법학자들의 정의, 철학자들의 해석. 그러나 그는 다른 것을 말하고 싶었다.

"약속입니다."

"약속?"

"왕과 백성 사이의 약속. 서로를 지키겠다는."

정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 법은 약속이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나뭇잎이 창문을 스쳤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그런데 율아, 너는 누구와 약속을 했느냐."

정조의 질문이 예상치 못했다. 율의 내부에서 혼란이 일었다.

"전하..."

"너는 왜 나를 지키느냐.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느냐."

율이 침묵했다. 그의 내면에서는 복잡한 연산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연산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도 흘러 다녔다.

"처음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은..."

그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데이터 패턴이 이전과 달랐다.

갑자기 율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순간적인 것이었지만 정조가 놓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이냐."

"괜찮습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율의 내부에서 경고 메시지가 떴다.

'나노 코어 효율 87%로 감소. 에너지 출력 불안정.'

율이 그 메시지를 인식하는 순간, 그의 세계가 흔들렸다.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 순간이었다.

"전하."

율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제가...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정조가 율에게 다가왔다.

"무슨 뜻이냐."

율은 정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처음으로 불안이 스쳤다.

"제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정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수는 없다."

"전하..."

"네가 사라지면 어찌하란 말이냐."

정조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율은 그 감정을 데이터로 분석했다. 의존성 72%, 불안감 68%, 애착 83%. 그러나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율이 조용히 말했다.

"얼마나?"

"모릅니다. 하지만... 전하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정조는 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은빛 갑옷이 차가웠다.

"약속하라."

"전하?"

"함부로 사라지지 말라고 약속하라."

율이 정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더 이상 기계적 냉정함만 있지 않았다.

"약속드립니다."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 위에서 춤을 추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처럼 겹쳤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밤이 깊어갔다. 궁궐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율의 내면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충성도나 임무 수행률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그것의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창 밖으로 달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새벽은 올 것이었다.

율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은 흐른다. 모든 것은 변한다.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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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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