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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만들기

by 김영훈

인생이란 상식이 무너지면서 그 다음으로 계속 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상식은 내가 개인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명하다고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아주 어릴 때에는 그것이 당연히 좋은 것이고, 당연히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도저히 잘 지낼 수 없는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별히 중고등학교 시기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폭발했던 시기였다.

물론 성인이 되면서, 사춘기 때 생겼던 그러한 분노와 적대감은 점점 사그라들게 되었다. 사실 사그라들었다는 표현보다는 그 방향이 상대방에서 나 자신에게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나 자신의 이해할 수 없음.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 언어화될 수 없는 모호함들이 밖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내 안에 켜켜이 쌓여갔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속에서도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욕망만큼은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인류애로 충만한 대단한 평화주의자여서가 아니다. 단지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불가능할 지라도, 나에게 특별히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적어도 적을 만드는 것만큼은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혹은 나 자신의 평화를 위해 피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40대를 지나면서 나의 이러한 생각과 믿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붙들고 있었던 상식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나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의 생존과 평화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적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것이 이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라는 것을 기어코 승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거나 살아있지 않은 허수아비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적대적 공생. 사람들은 누군가를 악마화 하고 희생양으로 삼아 끊임없이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종교의 영역에도 두드러졌다. 구호만 있고 내용은 없는 자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평등이니 공정이니 생명이니 상생이니 정의니 평화니 하는 빈말들은 늘 퀘퀘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기만의 냄새이고, 누군가의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다. 그 누군가는 투명인간이다. 늘 자신의 자리가 없어 떠도는 자들이고,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상화하는 모든 가치들은 항상 그들이 적으로 삼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런 일들에서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세상에 적응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것도 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드는 일은 나에게는 늘 어려운 일이다. 주저하고 머뭇거리다가 밀려나면서도 도저히 실력이 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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