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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라는 강요

by 김영훈


저는 나이를 먹을수록 입을 다물고 사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가 계속 입으로 무언가 떠들지 않으면 안 되는 목사라는 것이 참 얄궂은 운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제가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이 모든 사안에 대하여 참과 거짓을 감별해야만 하고, 찬성과 반대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과거의 기억들을 정직하게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과거에 하셨던 그런 감별과 선택은 성급한 행동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사안인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시류에 휩쓸려, 섣불리 감별사가 되려고 하거나 해결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저도 과거에 제가 했던 일들이 떠오를 때면 부끄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으면,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합니다. 이 세상에는 참인지 거짓인지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찬성과 반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 한가한 소리한다고 엄히 꾸짖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요즘 핫이슈인 동성애 같은 것은 다릅니다. 저는 동성애에 대해 잘 모르고 실제로 동성애자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깊게 알고 싶지도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동성애에 대한 입장도 없고, 동성애에 대해 잘 모르면 목사로서의 자격을 의심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속한 감리교는 목사 자격 심사를 할 때,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묻는다고 합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일입니다.

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창조와 부활과 같은 신앙고백입니다. 사실 저는 창조라는 신앙고백 하나도 소화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마치 창조는 당연히 아는 것처럼 더 이상 고민하거나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반면, 동성애에는 왜 그렇게 열심인 겁니까? 동성애에 찬성하거나 반대한다는 것을 목사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인지 후천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동성애에 찬성하거나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에 대하여 사람들의 찬성을 받으실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웃의 사적인 성행위에 대해 반대하실 것입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이 로마서 12장 3절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요즘 이 말씀이 참으로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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