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전에 크립을 구입해 조립하면서 당연하게 안방의 부부 침대 옆에 붙여 뒀다. 아기가 너무 어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셋이 한 방에서 자며 돌발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려는 심산이었다.
막상 아기가 크립에 누워 있으니, 온갖 소리가 한시도 쉬지 않고 들려온다. 울음소리가 대부분이다. 끙끙대거나 딸꾹질하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도 바로 옆에서 생생히 들린다. 덕분에 내 머릿속에 “긴급 상황이다! 돌발 상황이다! 뭐라도 해라!” 하고 명령하는 신호가 단 한시도 꺼지지 않는다. 사이렌을 켜고 자는 것 같다.
나는 타인과 같이 한 방에서 자는 것이 조금 힘들다. 남편과 한 침대를 쓰지만, 숨소리가 크게 들리면 신경 쓰여서 잠을 못 이룰 때가 많다.
그런 상황에 이제 룸메이트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작고 시끄러운 생명체다.
침대 위의 커다란 1인, 크립 안의 조그만 1인 사이에 누운 나는, 잠이 안 온다. 어두워서 시각적 자극도 없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으니 청각에 온 정신이 집중된다.
아기의 소리에 그대로 노출되어 누워 있노라면 저절로 죄책감이 들었다. 왠지 내가 계속 아기를 돌봐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저 소리를 내는 원인이 무엇인가? 어떻게든 내가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아무리 보호자라고 해도, 아기의 모든 소리에 일일이 다 반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둬도 괜찮은 것들이 있다. 아기의 딸꾹질 같은 것들이 그렇다.
낮에는 내가 그냥 넘겨도 되는 신호들이 어느 정도 구분이 되었다. 완전히 맨 정신이 아닌 밤에는 그게 잘 안 됐다. 내가 아기와 한 방에서 자면, 언제 내가 일어나서 아이를 직접 살펴야 하는지 도저히 이성적으로 구분할 수가 없었다. 초조했다. 모든 소리가 다 위기 신호로 느껴졌다.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아기가 나오기 전부터 '베이비 위스퍼 골드' 책을 여러 번 정독하며, 그 책에 나온 방법대로 분리수면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압사사고 예방 등 신생아의 안전과, 온 가족 수면의 질 향상 등 많은 장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생후 서너 달 정도에 하면 되겠지 하고 계획했는데, 아기를 낳고 보니 서너 달은 나에게 영원과도 같은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생후 39일 만에 크립을 아기 방으로 옮겨서 재우게 되었다. 분리수면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미국에서 자란 남편과도 의견이 일치하여 이에 따른 갈등은 없었다.
지금도 우리 부부와 아기는 각자 다른 방에서 자고 있고,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아기들이 생후 한 달 만에 분리수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분리수면은 주 양육자인 나의 기질과 성격상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실행한 것뿐이다. 남편 외에 도와줄 인력이 없는 타지 육아 상황에서, 내 정신과 체력을 보호할 최선의 선택은 분리수면이었다.
분리수면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단언컨대 한 시간도 푹 잘 수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각성 상태로 인해 (더 심하게) 정신 건강을 해쳤을 수도 있다. 잠을 못 잔 인간은 웃을 힘이 없다. 아기에게 명랑하게 말을 걸어 줄 실낱같은 기운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아기와 따로 잘 때 마음이 더 불편하거나, 본인이 아기와 같이 자는 기쁨이 커서 한 방을 쓴다면 그건 그 부모의 정답이다.
분리수면을 한다고 해서 당장 부모의 밤이 극적으로 평화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최소 SIDS (영아 돌연사 증후군) 위험도가 떨어지는 첫돌까지는 매일 밤 베이비 모니터의 화면과 소리를 켜 놓고 옆에 두고 자야 한다. 아기 움직임이 한동안 멈춰 있으면 혹시나 싶어서 움직일 때까지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다 움직이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움직임이 너무 안 보이면 뛰어가서 확인한다.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 바짝 긴장이 된다. 신경 쓰이는 정도가 100에서 75 정도로 줄었을 뿐, 항시 준비 태세인 건 마찬가지다.
베이비 모니터로 아이를 관찰하면 객관성이 생긴다는 장점은 있다. 물리적인 거리 덕택인지, 아기가 내는 소리가 전부 위기상황으로 들리던 현상이 줄었다. 내가 찾아가서 반응해줘야 할 소리들을 더 잘 구분하게 되었다. 카메라 렌즈가 거름망이 되어 스트레스가 걸러진 느낌이다. 그 약간의 거리만으로도, 내 불안과 강박감이 꽤 누그러졌다.
분리수면 하면 흔히 떠올리는 그림은 이렇다.
목욕, 책 읽기, 자장가 등의 수면의식을 한다.
아기를 크립에 눕힌 후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온다.
아기가 스르르 잠들어 아침에 일어난다.
솔직히 이것은 분리수면의 궁극적인 목표일 뿐, 현실의 모습은 많이 다르긴 하다. 신생아 시기의 첫 시작 과정이 많이 생략된 그림이다.
수면의식 후 크립에 눕히면 보통은 자지러지게 운다. 잠 못 자고 우는 신생아를 달래다가 좀 잦아들면 크립에 내려놓는다. 그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운이 좋으면 크립에서 그대로 잠드는 것이다. 심하게 울면 달래다가 새벽이 다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안고 서서 달래든, 흔들의자에 앉아서 달래든, 잠든 아기의 종착지는 크립이다. 그게 분리수면의 핵심이다. 물론 100% 그럴 순 없다. 예외는 있다. 너무 못 자는 날에는 소파에 앉아 내 가슴팍에 아기를 엎어 놓고 낮잠을 재운 날도 종종 있었다. (단, 그 상태로 내가 잠들면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에, 한 손에 스마트폰 준비가 필수다)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크립에서 자다가 잠을 깨는 것이 원칙이다. 크립만이, 아기에게 주어진 잠자리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말과 행동으로 전달하는 것이 분리수면교육의 과정이다.
위에 나열한 분리수면의 '목표'가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으로 들리지만, 우리 아기의 경우 분리수면에 완전히 익숙해진 상태에서 이앓이가 없는 조건이 갖춰지면 가능하긴 했다. 본격적인 이앓이 전후로 몇 달은 저렇게 수월하게 자곤 했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황홀했다. 한 인간의 우아한 삶으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39개월인 현재는 웬걸, 다시 새벽에 서너 번씩 깨서 부모를 부르며 운다. 내 밤잠은 다시 세 토막 네 토막이 났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다. 요새 나보다 더 많이 먹는 걸 보니 폭발적인 성장 시점이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몇 달 공들인 프로젝트가 본부장님의 일신상의 사유로 한순간에 엎어져, 초기 작업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개 사원(?)의 입장으로서는 심란하기 그지없다. 3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비슷한 일이 수도 없이 있었지만, 한동안 너무 이상적으로 잘 자다가 갑자기 초기화되니 더욱더 쓰라리고 억울하다.
분리수면 통잠의 달콤함을 이렇게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 본부장님. 잘 생기면 다예요? 네? 보조개만 예쁘면 다냐고요?
분리수면 통잠은 한 번 이뤄냈다고 끝이 아니었다.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모종의 이유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다. 또 이전의 과정을 인내심 있게 반복해야 한다.
하긴, 수면만 그런 게 아니다. 생활습관이나 훈육 등 육아의 모든 요소에 그런 면이 있다. 아기가 자라며 구성 요소가 상위 버전으로 바뀌기 때문에 '울음'이라는 도구로 최적화를 실행하는 걸까. 아기 본인도 나날이 수준이 높아지는 운영체제에 적응하기 힘들긴 하겠다. 그 변화에 매번 버벅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과연 내 우아한 삶은 언제 다시 돌아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