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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Jan 09. 2024

두려워할 용기

살다 보면 부조리한 것들, 불의로운 것들, 위선적인 것들, 하여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게 된다.

자연은 아무런 문제 없이 그저 그럴 뿐인데, 그러한 현상들 뒤에는 항상 인간이 핸들을 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한 사람도 많고, 이상한 척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 이상한 것을 알면서도 그 것과 하나 되어 사는 사람.

바보들도 많고, 바보인 척 하며 살아 가는 사람, 바보인 걸 알면서도 바보로 살아 가는 사람.

위선자들도 많고, 위선자 아닌 척 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 위선인 지 알면서도 위선자로 살아 가는 사람.

뭐, 이런 식이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전부 우리 모습이며, 그 안에 속한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공상 창작물이나, SF 영상에 나오는 추악한 괴물은 그저 가공의 창작물일 뿐, 인간은 현존하는 괴물 그 자체이다.

인간만이 모든 것을 비틀고 가공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별의 별 짓을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너무 안 좋은 것들만 보고 부정적 얘기를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서도.


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싸워서 지기 싫어 한다는 식이라기 보다, 난 항상 누구를 만나더라도 항상 떳떳하고프다.

내가 어디에 속하더라도 그 영역 안에서 마이너스적 존재가 되는 것이 몹시 싫은 사람이다.

행여나 내가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피해를 줬거나, 무례한 짓을 했다면, 나는 "내가 고작 이런 사람인가?"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채찍질한다.


살다 보면 남의 허울도 많이 보이지만, 세상은 부정이나 비리, 도덕이 결여된 상태로 돌아 가는 것 또한 순리이고, 또 그렇게 될 수 밖에 돌아 왔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이 가득한 현재가 있는 것이고, 이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레고로 성을 쌓으며 놀다가, 방 안이 온통 엉망이 되는 것처럼.

이러한 세상에 살아 가는 나 또한, 경우에 따라서 그러한 부조리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 부득이한 최선의 선택에 몰릴 때도 많았고, 그러면서 또 그런 못난 자신을 변호하고 지키기 위해 거듭 구정물에 물들어 가게 되었다.

내가 싫어 하는 세상의 구렁텅이에 나도 빠진 것이다.


이런 반조를 하면 할 수록,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 저 것을 잘못됐다 손가락질하기 보다, 왜 사람이 저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게끔 사회 구조가 형성이 되어 있으며, 과연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최선의 행동이며, 타당성을 가지게 되었는 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알면 알 수록 부조리는 부조리가 아니란 귀결점의 퍼즐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규정하는 부조리란 것은, 현상에 대해 전후사정을 전부 파악하지 못 한 상태에서 피상만 보고 부조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콩을 심었는데, 콩 심은 줄 모르고 팥이 났다고 화를 낸다.

분명 잘못 운영을 한 것이 있음에도 그 것을 발견할 줄 모르고, 자신은 모든 것을 제대로 처리했는데, 결과가 엉망인 것을 타인을 탓하거나, 자신은 놔 둔 채, 뭔가 세상을 탓한다.

그러나 이 또한, 그 사람이 그렇게 세상을 잘못 볼 수 밖에 세상이 돌아 갔고, 자신이 자신의 참모습 조차 망각할 정도로 살아 온 과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 사람을 탓하고 미워하는 감정 또한 사라 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돌아 가고 있으며, 뭔가 내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이 것을 외부에서 찾을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째서 자신을 돌아 보지 않는가?

왜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 안에 잠재하는 괴물의 흉한 모습을 바로 볼 용기가 없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한다.

내가 싫어 하는 어떤 부류들, 어떤 사람들의 흉하고 혐오스런 모습들.

그런 모습이 각자 자신에게도 조금씩은 있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나, 형태는 다르다 해도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점들.

그 것은, 괴물이 상황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 온갖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둔갑하는 것처럼.


타인의 문제점을 보며, 그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 보는 것은 위험한 짓이기도 하다.

그 것은, 내가 가진 아상이 무너 지는 것일 테니.


"나는 예의 바르고 젠틀한 사람이야. 나는 항상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나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항상 정의로운 길을 추구해."


"나는 항상 옳은 일을 해 왔어, 내가 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해선 안 돼. 만일, 어려운 이웃을 보고도 외면한다면, 그 것은 비겁한 자야.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아."


"너를 위해서야. 너가 잘 되길 바래서 그런 거야.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지."


정말 그런 지를 하나하나 따져서 내 자신을 추궁해 들어 가면, 내가 얼마나 내가 그려 온 멋진 자화상이, 뒤틀린 괴물이 멋대로 휘갈겨 놓은 스케치 북 속 동화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 자신은 절대 저런 사람처럼 살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철썩같이 그 신념 대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고.

그러나, 내 자신을 추궁해 들어 가 보면, 믿기 싫을 만큼 그렇게 살고 있다.

그 게 내 모습이었다.

철저히 자신을 기만하며, 내 자신 속 미쳐 날 뛰는 괴물을 외면하며, 아니,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그 괴물과 손을 잡고 살아 가고 있었다.

그 게 나였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 보지 않는 것이다.

두렵기 때문에.

내 자신의 멋진 자화상이 점점 무너 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직시하면 직시할 수록 두렵다.

내가 증오하는 모습, 내가 절대로 원치 않는 모습, 직시할 수록 그 게 내 모습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


'두려워 할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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