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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Mar 04. 2024

마늘밭의 로제트

Episode 08. 냉이


나는 따뜻한 사람이다. 겨울에 나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손이 참 따뜻한 사람이었어. 마음씨는... 잘 모르겠지만.'


덥거나 몸이 안 좋을 때 한바탕 땀을 쫘악 빼고 나면 금세 가뿐해지는 타입이다. 그렇지만 고온다습한 날씨가 계속되는 여름은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아무리 땀을 흘려도 체온이 쉬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은 어떤 날씨를 싫어할까? 겨울눈을 만들고, 낙엽을 떨구고, 수분을 줄이고, 줄기를 두껍게 만드는 등등, 차근차근 다음 계절을 준비해 나가는 식물의 특성을 살펴보면 더위보다는 추위를 더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덥고 습한 날씨에는 증산작용을 최대한으로 가동하여 빠르게 체온을 낮출 수 있지만 갑작스럽게 한파나 서리가 이어지면 쉽게 대응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사는 지역은 5월 초가 돼야 서리가 끝난다. 그래서 날이 포근해졌다고, 산과 들에 꽃이 만발하다고, 시장에 모종이 나왔다고, 부지런히 고추나 토마토, 가지 등을 옮겨 심었다가는 하룻밤 새에 냉해를 입고 시들어 버리고 만다. 텃밭 농사를 지어 본 분들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어디 서리뿐인가... 가뭄, 장마, 잡초, 해충, 이웃의 관심(이라 쓰고 오지랖이라 읽는다)까지... 한 평 가꾸기도 쉽지 않다.  


나도 여러 해 동안 텃밭을 가꾸고 있다... 고 했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집에서 꽤 떨어져 있어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정도. 위치는 숲 바로 아래에 자리한 데다가 바로 옆에 자연습지가 되어버린 묵논이 있어 사시사철 멧돼지와 고라니를 비롯한 다양한 야생동물과 조류, 곤충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텃밭에는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채소와 열매가 준비되어 있다. 몸이 가렵거나 찌뿌둥하면 묵논에 뛰어들어 목욕을 즐길 수 있다. 한여름에는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시원하게 낮잠을 청할 수 있다. 무엇보다 텃밭 주인의 개똥철학 - 농약과 비닐제품 쓰지 않기 - 덕분에 이 모든 것을 안. 심. 하. 고. 즐길 수 있다!' 아무래도 이렇게 소문이 난 것 같다.


마을 어르신들은 내 밭을 지날 때마다 혀를 찼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의문 투성이다. 간혹 탄식을 넘어 분노를 표하는 분들도 있었다. 밭 갈 때 살충제를 넣어라, 여름에 풀이 번지지 않도록 밭둑에 제초제를 뿌려라, 2미터 40짜리 고춧대를 박고 그물을 쳐라, 비닐 멀칭을 해라, 저 땅은 왜 놀리고 있냐... 그러나 몇 해 전 마늘을 심기 시작한 뒤로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신다.   


야생동물과 어르신들의 관심을 피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 끝에 마늘을 선택했다. 10월 말에 심고 다음 해 6월 말에 거둔다. 9월 말까지 풀이 자라게 둔다. 10월에 들어서면 풀을 베고 밭을 만든다. 베어둔 풀은 겨우내 이랑을 덮었다가 봄이 되면 고랑으로 내려 온도와 습도를 지키는 데 쓰인다. 다른 풀이 올라오는 것을 줄이는 효과는 덤이다.    


요즘 우리 마늘밭에는 냉이가 제철이다. 대부분의 초본식물과 다르게 냉이나 지칭개, 뽀리뱅이 등은 잎을 낸 채로 겨울을 난다. 줄기의 간격은 최대한 줄여 흙에 가까이 붙이고, 새 잎은 먼저 나온 잎을 가리지 않도록 각도를 틀어서 낸다. 장미처럼 겹겹이 두른 잎 - 로제트 Rosette라 부른다 - 덕분에 햇볕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다. 텃밭에는 광합성을 위한 양분도 풍부하니 냉이가 자라기에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무엇보다 농약을 쓰지 않아서 그런가, 동네어르신들도 안. 심. 하. 고. 찾으신다.


냉이꽃 피기 전에 얼른들 캐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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