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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바라기 Sep 22. 2023

5. 예전의 나를 만날수만 있다면..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만, 가끔 차라리 사고를 당한 게 낫겠다 생각한 적도 있다. 원망할 대상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을 원망하면서 또 용서하면서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오지랖 넓은 사람들에게 그렇게들 궁금해하는 내 병의 ‘원인’에 대한 궁금증을 금방 해소시켜 줄 수 있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가족 중에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난 아파야만 했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억울한 느낌도 안 들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급작스럽게 평범한 여학생이었다가 곧 죽을 수도 있는 암환자로 하루아침에 바뀐 것이다. 내 인생이 교복 입고 친구들과 까불며 수다 떨고 숙제하느라 정신없던 여고생에서 병원복 입고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를 정도로 사경을 헤매는 소아암환자로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마음으로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지만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한 치 앞도 모르고 그냥 바뀌어 있었다. 매일이 꿈인가 싶을 정도로, 아니 어떤 날은 내가 미국에서 여고생이었다는 게 오히려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뭐가 현실이고 아닌 건지 생각이 혼란스러웠다.


치료만 받으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던 미국 의사의 말을 들었기에 ‘그래,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 희망이 한국에 오자마자 뭉개졌고, 예전의 나로는 다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숨 가쁘게 뛸 수 있을 수도 없고 마음껏 공부를 하는 것도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대학을 갈 수 있을지.. 결혼을 할 수 있을지..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어렴풋한 미래도 모두 나에겐 이제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나에겐 생존만이 지금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심이었다.




항암의 독성은 정말 강력했다. 머리가 점점 얇아지더니 빠지기 시작했고 몸은 점점 메말라갔다. 암중에 가장 아프다는 골육종은 암 자체로의 뼈가 뒤틀리고 있는 통증이 심한 데다가 가장 독성이 강하다는 항암제를 종합 선물 세트로 투여해야만 했다. 강력한 항암제를 쓰지 않으면 뼈암 덩어리 크기가 줄어들기 힘들고 전이도 잘된다고 했다. 보통 다른 암환자들은 짧으면 당일 외래 주사실에서 몇 시간만 항암제를 맞고 집에 가거나 3-4일 입원해서 여러 항암제를 세트로 맞았지만, 골육종 항암 일정은 단 한 종류의 항암제 투여가 최소 일주일 입원이었다. 3~4 종류의 항암제를 한 번씩 연달아 맞는 게 한 개의 사이클이라고 했을 때 보통 4-5번 사이클을 맞는 걸로 항암 계획을 하는데, 다른 암환자들이 한 사이클을 끝내는 게 한 달이라면, 나는 일정이 밀리지 않으면 최소 4 달이었다.  금방 빨리 치료받고 일상으로 가는 건 이미 말도 안 되는 얘기였던 것이다.


가장 독성이 강한 항암제들로 투여될 거라 힘들 거라고 의사가 말을 했지만 이 화학 독성을 17살 소녀의 몸으로 온전히 소화하기엔 생각보다 훨씬 버거웠다. 입원 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밥을 먹어보질 못하자 입원 3달 만에 15kg가 빠져 거의 35kg 정도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 몸무게로 바뀐 것이었다. 뼈밖에 안 남은 몸으로 암이 자라고 있던 다리의 뼈가 뒤틀리는 통증을 감당해야만 했다. 최대한 항암제로 암 크기를 줄이고 나서 수술을 진행해야 돼서 암덩어리로 인한 통증을 초반 몇 달 동안은 어쩔 수 없었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침대 난간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다 혼절하듯 기절하기를 몇 번이었다. 잦은 진통제 투여에 항암제까지 맞다 보니 간이 망가질 데로 망가지고 있었고 무호흡증도 수시로 찾아왔다.


먹은 것도 없는데 항암제 부작용으로 계속해서 토했고 진녹색 쓸개즙까지 토해내느라 내 몸은 만신창이였다. 쓰디쓴 쓸개즙이 나올 때면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입안도 얼얼할 정도였다. 고통스럽게 계속 토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부모님은 참을 수 있으면 참아보라고 했지만 항암제 부작용의 구토는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마치 혈관에 들어간 항암제의 독성 때문에 내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하루는 병실 침대에서 한참을 기절해 있다가 다시 뼈가 뒤틀리는 고통에 눈을 떴다. 한밤중이라 병실은 캄캄했고 난간 사이로 아빠가 내 손을 꼭 붙잡고 나를 보고 있었다. 고통이 점점 강해지자 난 아빠 손을 있는 힘껏 잡고 부르르 다시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를 보고 힘없이 울며 말했다.


아빠.. 나 좀 살려줘.. 너무 힘들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아빠의 볼에 타고 흐르던 반짝이던 눈물이 기억난다. 반짝반짝 빛날 줄만 알았던 딸이 죽음과 사투하면서 사시나무 떨듯 사경을 헤매고 있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던 아빠에게도 너무나도 처참한 순간이었다.


머리길이가 허리정도까지 왔었는데 두 번째 항암을 시작하자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다. 매일 병원 침대에 누워서 고통에 머리를 허우적거렸더니 내가 모르는 사이 머리카락은 죽은 머리카락과 아직 살아있는 머리카락이 서로 얽히고설켜 아주 엉망이 되었다. 엄마가 빗어보려고 했지만 너무 엉켜있어 도저히 빗겨지지도 않았다. 마침 병원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대상으로 샴푸 봉사가 있었고 몇 명의 봉사자들이 내 병실을 찾아왔다.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으면 이동식 세면대로 직접 샴푸를 해주는 서비스였다. 단순히 머리 엉킨 거라 생각하고 린스를 많이 해서 엉킨 머리를 풀면 될 거라 생각해서 불렀다. 3-4달 만에 시원하게 머리를 감은 것이었지만 내 머리는 영영 복구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봉사자들은 내 머리가 엉킨 것을 감안하지 않고 시원하게 감겨주려고 벅벅 감겼고 엉킨 머리는 더 엉켜버려 단순히 린스로 풀어질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침대가 온통 빠진 머리카락들로 난리가 나자 엄마는 결국 이발 봉사자들을 불렀고 내 머리를 전부 밀어버렸다. 이젠 정말 누가 봐도 암환자 모습 그 자체였다. 머리를 밀기 전 병실 화장실 거울로 어렴풋이 보이던 내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눈 뜨고 있을 때가 거의 없고 뭘 읽거나 볼 일도 없어서 렌즈나 안경을 쓰고 다니지 않았기에 아주 어렴풋이만 보였다. 내 모습을 봐야지라는 마음의 여유도 없고 뭘 먹질 못하니 화장실도 안 간 지 3개월이 넘어 거울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 와중에 머리 밀기 직전 내 모습을 몇 달 만에 본 것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예전의 나의 모습과 그나마 가까웠던 그때의 내 모습을 거울로 찬찬히 보고 싶다. 찬찬히 보면서 작별인사하고 싶다. 많이 그리울 거고 보고 싶을 거라고 나 자신한테 말해주고 싶다.


머리를 밀고 나니 눈썹도 빠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털이 빠지는 것이었다. 엉키고 엉켰던 머리를 밀고 나니 오히려 시원하긴 했고 엄마 아빠는 갓난아기 때 보고 못 봤던 내 두상을 만지며 귀여워하셨다. 의사들도 친구들도 두상이 이쁘다며 나를 다독였다. 이때 아니면 내 민머리를 언제 볼 수나 있었겠나.. 내 두상이 이쁘다는 것도 알게 되고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민머리는 병원복을 입었을 때 제일 이뻤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평상복을 입으면 민머리가 너무 추했지만 병원복을 입으면 그나마 봐줄만했다. 아무리 모자를 사서 써도 평상복을 입으면 어색한 민머리가 감춰지지 않았고 외모에 민감했던 엄마는 내게 맞춤 가발을 사줬다. 어깨정도까지 머리길이의 가발이었는데 새로운 내 모습이었다.


한번 항암을 맞고 나오면 온몸과 얼굴이 빵빵하게 부었다. 부작용 중 하나였는데 몸은 깡마른 상태에서 얼굴과 손발이 물에 불은 것처럼 부었다. 퉁퉁 부은 얼굴에 가발을 쓴 내 모습.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제 바뀐 내 모습이었다. 머리도 몸도 얼굴도 다리도.. 뭐 하나 내 것처럼 느껴지는 게 하나도 없지만 이 낯선 내가 이제 나 자신이었다. 외모에 가장 민감한 시기에 내 모습은 형편없었다. 단 한 명이라도 짧은 치마와 바지를 입고 긴 생머리 휘날리면서 나를 지나갈 때면 내 마음은 마치 누가 할퀸 듯 아팠다. 교복 입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면서 까르르 웃는 여고생들이 지나가면 한동안 멍하게 눈물이 흘렀다. 왜 난 저들과 달라야 하는 건지.. 같은 나이에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데 왜 난!!! 이렇게 처절하게 고통받아야만 하는 건지.. 너무 괴로웠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더 이상 집과 병원 외에는 나가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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