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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같은 로맨틱한 장면은 없다.

by 벼리울

회색 벽, 한 층 내려가는 계단 길을 손으로 스치듯 맞닿는다. 스르륵 걸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다. 쭈그리고 앉은 여인 옆에 한 남성이 다가서고, 그녀에게 괜찮냐며 위로를 건넨다. 손수건은 없지만 뭉터기로 뭉친 휴지가 있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뻘게진 눈을 애써 감춘 채 웃음을 짓는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한국인 여자가 길을 잃었다. 벽을 따라 무작정 걸은 여성은 장사꾼을 피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비가 내리고 자리를 피하려 들어간 가게에서 만난 한국인 남성. 둘은 눈이 마주쳤고, 입술도 만나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아침. 둘은 인사도 없이 이별했다.


초등학생 때는 순정만화만큼 슬프고 애픈 문학이 없었고, 신나는 음악에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 소설 속 인물이 내가 된 것 같은 기분. 자연스레 그들과 동화되곤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를 이들과의 순간. 누군가 “저기요”라며 나를 불러주면 좋겠다 싶었지만 최근 들어 모든 부름은 “인상이 좋아서요”, “잠시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같은 종교인의 말뿐이었다. 뽀글거리는 머리와 긴 속눈썹, 초롱초롱한 눈이 없어서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그만한 고난과 행복도 없다는 것. 신데렐라나 그 외의 형용사로 불릴 만큼의 사건을 바라기엔 서로를 지키기에도 고단한 삶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과연 내가 주인공일지도 모를 일. 클리셰 가득한 해피엔딩. 상처보단 약간의 생채기에도 가득 발라 올린 후시딘 같은 삶이라면 어떨지 상상해 본다. 길바닥에 주저앉으면 누군가 다가와 괜찮냐는 말을 걸고, 금세 식어버린 커피 앞에 새로운 커피가 놓이는 일이랄까. 현실은 어떠한 위로가 없을 거란 걸 알지만 억지 이벤트라도 좋을 거란 상상.


헤어지자,라는 말에 눈물 콧물 다 빼는 것도 옛말 어떤 이벤트를 찾아야 할까. 글을 쓰던 노트북을 닫고 문 밖을 나섰다. 비가 내렸고 하늘은 붉은빛을 띠고 있다. 사랑니를 뽑아볼까. 10월에는 마지막 남은 사랑니를 뽑으면 새로운 이가 올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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