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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19. 2024

길 위의 철학자 ㅡ노점상露店商 노인의 오후

김왕식








                 길 위의 철학자
ㅡ노점상露店商 노인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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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오후, 해는 기울어 길섶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람은 찬 기운을 품었으나, 노인의 작은 노점에는 잔잔한 고요가 흐른다. 돋보기, 낡은 지갑, 허름한 벨트, 그리고 오래된 고서 몇 권이 소박하게 펼쳐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히 걸음을 옮기고, 노인의 자리는 쉽게 눈길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노점 한편, 돋보기를 낀 채 허리를 약간 굽히고 책을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은 무언가 신성한 의식을 연상케 한다.

돋보기 너머로 펼쳐진 한 권의 고서, 그 속에 담긴 글귀들이 그의 마음에 씨앗처럼 심어진다. 비록 이 작은 노점이 생계를 위한 자리일지라도, 노인은 물건을 팔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길 위에서 철학과 문학의 향기를 품는 이방인이며, 느린 삶을 연주하는 시인이다.

손님은 좀처럼 그의 자리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지나칠 때, 희미한 웃음이나 지나가는 말로 그의 물건을 평가한다. 그러나 노인은 개의치 않는다. 그의 마음은 이미 논어의 한 구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군자는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라는 공자의 말이 돋보기 너머로 아스라이 빛난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읽으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그에게는 짧지 않은 세월의 책장이었고, 그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것이다.

노인의 독서 시간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의식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가 판매하는 물건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지언정, 그가 책을 읽는 모습에는 자연스레 눈길을 던진다. 그것은 상업적 행위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오히려 오래된 벤치에 앉아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한 인간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지나가는 이들에게도 일말의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독서에 몰두하는 노인의 손끝은 거칠다. 긴 세월, 이 손은 노동으로 단련되었으며, 그 흔적은 마치 나이테처럼 그의 삶을 말해준다. 벨트를 쥔 손, 고서를 넘기는 손, 그리고 돋보기를 고쳐 잡는 손. 그 움직임들은 단순하지만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책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는 어쩌면 자신만의 속도로 우주를 탐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늦가을의 태양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저녁빛이 물건들 위로 얇은 막을 씌운다. 지갑은 닳아 빛이 바래고, 벨트는 굴곡진 모습으로 놓여 있지만, 그 물건들 또한 노인의 삶을 닮았다. 오래되고, 낡았으며, 세월의 흔적을 품은 물건들은 단순히 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손님이 없어도 노점상은 만족한다. 손님보다 더 귀한 것이 그의 돋보기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논어 한 구절이 그에게 던지는 물음은 그의 하루를 채우기에 충분하다. 해가 저물어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그의 마음은 이미 글귀 속에서 빛을 찾고 있다. 독서란 곧 삶의 조명이며, 그에게 주어진 하루의 결실이다.

노점상의 일상은 겉보기에는 단조롭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단조로움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의 삶을 읽고 쓰는 독자이자 작가이다. 길 위에서 독서를 삼매경으로 이어가는 이 노인의 모습은, 이 바쁜 세상에서 한 편의 느린 시처럼 존재한다. 삶이란 결국 무엇을 이루느냐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음을 그는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가 완전히 져도, 노인은 가던 걸음을 멈춘다. 작은 등을 켜고 다시 돋보기를 잡는다. 노점의 물건들은 하루를 마감할 준비가 되었지만, 그의 독서는 이제 시작이다. 책 속에 길이 있고, 길 위에 삶이 있다. 그의 삶은, 그리고 이 하루는, 그렇게 작은 불빛 아래서 완성된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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