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선 시인과 김왕식 문학평론가
□ 한국여성인문학회회장 이혜선 선생님
□ 이혜선 시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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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 시인
-1950년 경남 함안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세종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1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신 한 마리>,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이>
<새소리 택배>. <흘린 술이 반이다> 등 6권
-저서 <문학과 꿈의 변용> <이혜선의 명시 산책>, <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 <아버지의 교육법>.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 평론상 등 수상,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2016)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현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이혜선 시인TV
-hs9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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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 끄고, 물로 타오르다
ㅡ이혜선 시인을 뵙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모든 만남에는 때가 있다.
어떤 만남은 ‘때’를 초월해, 하나의 상징으로 남는다. 한국 여성문학의 산실을 일구어 온 이혜선 시인을 뵌 날이 그러했다. 이름 석 자만으로도 문학의 결이 느껴지는 분을, 문단의 한 모퉁이가 아니라,
내 옆자리에서 뵙는 인연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사였다. 문장은 적막을 뚫고 오는 고요한 울림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분의 눈빛에서 배웠다.
오늘 우리는 ‘코리안 드림 문학회’라는 이름 아래 한자리에 앉았다. 마치 고대의 서원에 모인 학인들처럼, 시와 정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투명한 다리가 놓였다.
나는 문학강연 일환으로 준비해 온 몇 권의 책을 선보였다. 미당 서정주의 『花蛇集』, 청록파의 『靑鹿集』, 그리고 먼 조상의 숨결이 배어 있는 서포 김만중의 한문본 『九雲夢』. 그것들은 한 시대의 숨결이며, 살아 있는 정신의 체온이었다. 이혜선 시인은 그 책들을 마주하자 조용히 손을 얹고,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오래된 활자의 숨소리를 들으셨다.
그 손길은 마치 백 년 묵은 숲의 이끼를 쓰다듬는 듯 조심스러웠고, 그 시선은 바람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깊었다. 고전의 숨결을 읽어내는 그 섬세함은 단지 독서의 자세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전 생애가 문학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예였다.
문단 중심에 선 이혜선 시인의 자리는 우연이 아닌, 오랜 시간 깎고 다듬은 성좌(星座)의 자리임을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시집 한 권을 받았다.
제목은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르다』. 그 상반된 요소의 충돌은, 곧 이혜선 시인이 걸어온 문학의 궤도와도 같았다. 상식과 통념을 깨뜨리고, 상반된 것들을 껴안아 하나의 진실을 끌어올리는 언어의 마법. 불로 껐다는 것은 곧, 불이 불을 멈춘다는 역설이고, 물에 타오른다는 것은 물조차 불꽃이 될 수 있다는, 시의 오묘한 반전이다.
이혜선의 시는 그렇게 대상을 뒤집고,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 본질에 다다른다.
그 책을 받는 순간, 나는 마치 한 편의 시를 건네받은 것이 아니라, 한 생의 결을 받은 듯했다. 종이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문장의 깊이는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속에는 여성을 넘어 인간으로서, 시인을 넘어 존재로서, 불꽃같은 통찰과 물처럼 깊은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문학이 그리는 작은 기적이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분의 침묵은 외려 더 많은 시구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을 되새기며 생각했다.
시란 결국, 누군가의 생을 통째로 받아 적는 일이며, 선생님의 시 한 줄은 그 자체로 생의 복사본이라는 것을.
‘불로 끄고, 물로 타오르는’ 언어의 연금술사 이혜선. 그분이 남긴 한 권의 시집은 내 책장이 아니라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서가에 꽂힐 것이다.
오늘의 만남은 한 편의 시처럼, 여운으로 남는다. 이제야 그 말씀을 들었다.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남긴 침묵의 무게를.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