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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론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랑론

— 존재를 빛으로 키우는 기술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사랑을 배워본 사람은 드물다. 사랑을 감정으로만 착각하는 한, 우리는 늘 우연과 충동의 파도에 흔들리는 존재에 머무른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기술(Art)”이라 말했다. 기술이라면 당연히 배움이 있어야 하고, 수련이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성숙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고, 성숙한 사람은 그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는다. 사랑은 누군가를 발견하는 행운이 아니라,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자기를 길러가는 평생의 연습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에는 돌봄이 있다. 돌봄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상대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는 깊은 감응이다. 상대가 기뻐할 때 마음이 밝아지고, 상대가 아플 때 마음이 서늘해지는, 그 떨림이 사랑의 첫 단계다. 돌봄이 없는 사랑은 욕망이고, 돌봄이 있는 사랑만이 관계를 사람답게 만든다.

그러나 돌봄만으로는 사랑이 성숙하지 않는다. 사랑은 책임을 동반한다. 책임은 누군가의 삶을 대신 짊어지는 고통이 아니라, “함께 서겠다”는 조용한 결단이다. 피할 수 있는 순간에도 머무는 사람, 외면할 수 있는 순간에도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 그것이 사랑의 책임이다. 말이 아니라 선택으로 증명되는 단단한 마음이다.

존중 또한 사랑의 핵심이다. 존중은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는 태도이며, 상대가 자기 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여백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해방이어야 한다. 품는다 하여 가두지 않고, 가까이하면서도 얽매지 않는 관계가 가능할 때, 사랑은 비로소 숨을 쉰다. 억압으로 짙어진 관계는 깊어 보이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존중으로 자란 관계는 고요하지만 무겁게 빛을 남긴다.

그리고 이해가 있다. 이해는 변명해 주는 일이 아니라, ‘그 마음이 거기까지 오기까지의 시간’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성격 뒤에 상처가 있고, 고집 뒤에 두려움이 있으며, 침묵 뒤에 잃어버린 체험이 있다. 이해는 상대를 뚫어보려는 시선이 아니라, 함께 바라보려는 시선이다. 이해가 깊어질수록 사랑은 안정되고, 관계는 더 넓은 호흡을 얻게 된다.

돌봄, 책임, 존중, 이해. 이 네 가지는 사랑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다. 능력은 훈련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감정의 불꽃보다 인내의 지층을 더 많이 품는다. 감정으로 사랑은 시작되지만, 태도로 사랑은 완성된다. 사랑을 받으려 하는 사람은 모자람을 느끼고, 사랑을 주려는 사람은 풍요를 느낀다. 받는 사랑은 채워야 하고 사라지지만, 주는 사랑은 흐를수록 더 깊어진다. 이것이 사랑이 기술인 이유다.

사랑은 상대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성숙한 존재로 빚어져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자리이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도 불안을 품고, 성숙한 사람은 가장 불완전한 사랑을 만나도 빛을 키운다. 결국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것은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나이다. 사랑은 어떤 사람을 얻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능력의 성숙이다.

진짜 사랑은 운명이 아니다. 선택이다. 감정이 아니다. 실천이다. 순간이 아니다. 삶 전체의 태도다. 사랑은 가장 인간다운 기술이며, 배우는 사람에게만, 끝까지 연습한 사람에게만 비로소 그 깊이를 허락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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