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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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둥지에서 피어오른 한 시대의 시 의식
— 정근옥 시인의 《새들의 집》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권의 시집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단순한 출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한 시인이 긴 시간 동안 품어온 호흡과 사유, 뿌리 깊은 문학적 신념이 마침내 세계와 만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정근옥 시인의 새 시집 『새들의 집』은 바로 그러한 문학적 경건함 속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 앞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시의 본질을 향한 오래된 구도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이번 시집은 그 노정의 또 하나의 정점이며, 삶과 문학이 서로를 비추며 성찰한 맑은 결실이다.
정근옥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오늘의 시단을 깊은 우려 속에 바라본다. 시는 넘치지만 감동은 드물고, 작품은 많지만 품격은 희소한 시대. 이 척박한 현실에서 그는 다시 다산 정약용의 시학을 소환한다.
감정의 과장도, 형식의 현란함도 시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 시에는 도덕적 감화, 삶의 울림, 인간의 기쁨과 고통을 꿰뚫는 진정성이 담겨야 한다는 사실.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스승들이 늘 강조하던 가르침이 다산의 말과 정확히 맞물린다. 시는 곧 인격이며, 시인의 시선이 곧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오래된 진실을 그는 다시 꺼내 들었다.
이러한 태도는 이번 시집 《새들의 집》을 구성하는 102편의 작품 하나하나를 지탱하는 뼈대가 된다. 시편들은 화려함보다 정직함을, 관념의 비약보다 생활의 온도를 우선한다. 새벽의 바람, 삶의 고요, 어머니의 숨결, 계절의 기척, 인간의 상처와 회복 같은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이 시인의 손끝에서 품격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가 분명한 시,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하는지가 흔들리지 않는 시.
이 점에서 《새들의 집》은 오늘의 시단에서 보기 드문 ‘정직한 시집’이다.
정근옥 시인의 문학적 길은 곧 교육자의 길이기도 했다. 문학박사로서 중앙대학교에서 연마한 학문적 사유, 수십 년간 고등교육 현장에서 쌓은 경험, 한국현대시인협회 지도위원과 국제 PEN한국본부 감사로서 실천한 문학적 책임감이 그의 시 곳곳에 잔잔한 울림으로 배어 있다. ‘먼저 인간이 돼라’는 말은 그에게 단순한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문학의 혼을 구성하는 중심축이었다.
하여, 그의 시는 언제나 따뜻한 품을 지니고 있었고, 그 따뜻함은 독자에게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이번 시집의 제목인 《새들의 집》은 시인이 평생 추구해 온 문학적 가치와 정확히 호응한다. 새는 곧 자유로운 영혼이며, 시적 정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자유는 어디에서나 솟는 것이 아니라, ‘머무를 집’을 가진 존재에게서 비로소 생긴다. 정근옥 시인이 구축해 온 시 세계는 바로 그 집의 역할을 한다. 독자는 이 집에서 쉼을 얻고, 상처는 숨을 고르고, 기억은 따스한 날갯짓을 시작한다. 시집의 102편은 각각의 방이며, 동시에 한 영혼이 긴 세월 동안 정직하게 지어온 둥지다.
시인을 둘러싼 수상 경력과 공적 활동들은 화려함을 넘어 ‘문학과 교육의 일생’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외양보다 본질을 중시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타인의 마음을 울리는 시를 쓰고자 했고,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시가 걸어가야 할 의로운 길을 지키고자 했다. ‘허명을 좇지 말라’는 그의 말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다짐이었으며, 후학에게 전하는 고요한 충언이었다.
《새들의 집》은 그래서 한 시인의 시집을 넘어,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시대적 화답이다. 문학의 격이란 언어의 화려함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삶의 고통과 기쁨을 꿰뚫어야 시가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 시집은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독자는 책장을 넘길수록 알게 된다. 새들의 집은 결국 인간의 집이며, 각자의 마음속에 오래 머물 따뜻한 둥지라는 사실을.
올해 여름, 시인은 말한다. “오래 눈 뜨고 기다리고 있는 시편들을 모아 시집을 엮었다.” 그 말은 곧 오랜 세월을 품고 날아오른 지혜의 새들이 이제 독자의 마음 위로 내려앉는다는 뜻이다. 《새들의 집》은 그 착지를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완성한 시집이다. 이번 시집이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귀한 맑은 바람으로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란다.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