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가방


낡은 가방 하나
모서리가 먼저 늙었다

비에 젖고
벽에 부딪히며
말없이 시간을 닳게 했다

손잡이는
수없이 바뀐 체온을 기억하고
어깨는
가방보다 먼저 내려앉았다

안에는
비워진 물건들 대신
지나온 날들이 남아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낸다

읽다 만 문장 하나
끝내 보내지 못한 주소 하나
접힌 채 남은 마음이
안쪽 주머니에서 숨을 쉰다

새 가방은
앞으로를 말하지만
이 가방은
이미 지나온 길을
묻지 않는다

닳아버린다는 것은
쓸모없어지는 일이 아니라
오래 함께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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