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책사, 이후락, 그의 생가.
이후락(1924-2009, 이후 HR)은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이다. 격동의 시대에 대한민국에 음으로 양으로 큰 자국을 남긴 사람이다. 기자들이 이름 대신 이니셜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선두주자 정치인이 김종필(JP)과 이후락(HR)이었던 것은 이들 둘이 그만큼 제3공화국의 최고 실력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정희에게 김형욱과 차지철이 돌쇠였다면, JP와 HR은 박정희에게 제갈량과 사마중달이었다. JP와 HR은 유능했던 것만큼 박정희에게 위협적인 존재들이기도 했다.
박정희정권 하의 권력자들 중 HR은 다른 5.16 정변 주체들과는 결을 달리 하였다. 육사를 나온 것도 아니고 군 경력 중 박정희나 정변 주체와 인연의 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5.16 전부터 박정희를 사찰하고 뒷조사를 하던 정보 계통 장교였다.
그는 해방 전 일본군 하사관 경력을 가진, 해방 후의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이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50년대 후반 미 CIA에 의해 사실상의 한국 정보기관 수장으로 심어져, 1957년 경부터 박정희를 그림자처럼 사찰하였다. 미국 입장에서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큰 흠결을 가진 위험인물이었고, 더군다나 육사 교관 출신으로서 육사 출신 후배 장교들의 신망까지 두터웠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HR은 미 CIA에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였다. 미 CIA가 박정희의 정변을 훤히 알고 있었음에도 방치한 것은 어떤 연유였는지 아직도 미궁이다.
5.16 이후 HR은 군사 정변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곧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HR은 미국의 비호 하에 박정희를 계속 감시했고 박정희는 HR을 견제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박정희의 대통령 초대 비서실장으로 영전하였다. 미국에 HR은 공산주의자로 유턴할지도 모르는 위험 분자 박정희에 대한 유능한 감시자였다. 또한 박정희에게는 HR이 미국에 기댈 수 있는 통로이자 입의 혀처럼 자신을 보필할 줄 알았던 재간둥이 꾀돌이 책사였던 것이다.
80년대 대학가 대자보에 나붙었던 "한국은 미국의 신식민지다"는 언명들은 50년대와 6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2차 대전 이후 미 국무부 라데진스키에 의해 기획된 토지 개혁이 한국과 일본, 대만에서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이어 케네디 정부 때부터 로스토 교수의 이론에 기초하여 대소련 쇼윈도 전략이 역시 한국, 일본, 대만에서 성공적으로 이행되었다. 이들 국가에서 제조업 육성책(경제개발계획), 관치금융, 보호무역주의가 적극적으로 이식되어 자본주의 발전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변화된 대소련 봉쇄정책의 최대수혜국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이었다. 이 과정은 대규모 주한미군 주둔, CIA의 노골적인 활동, 대사관과 영사관, 촘촘한 인맥 관리 등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미국에 종속된 신식민지 체제라 고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의 중심에 HR과 JP가 있었다.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온전히 한미관계의 변화, 권력체제의 생리를 온몸으로 체현했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입만 바라보던 많은 이들을 실망시킨 채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보고 듣고 행했던 것의 반이라도 남기고 갔더라면 한국현대사 교과서는 많이 바꿔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쌍칼을 쓰려고 작정한 듯하다. 경제적,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기대어 통 큰 발상을 굶고 헐벗은 대한민국에 대담하게 밀어붙여 조국의 미래상을 열어젖히려 했고, 통치적인 측면에서는 정책의 착근을 위해 강압적이고 동원적인 시스템을 운용하였다. 박정희는 근대/현대의 칼과 전근대의 칼을 함께 휘두른 쌍칼잡이였다. 음습한 정보기관을 내치에 이용하고, 폭압적인 국가 기구를 반대파를 찍어 누르는 데 적극 활용하였다. 이후락이나 김형욱 같은 이들이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박정희의 시나리오에서 필연이었을 것이다.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김일성을 만났던 중앙정보부장 HR은, 반전카드로 10월 유신도 함께 준비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던 HR은 윤필용에 의해 제 이인자로 호명되는 순간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고, 조급한 충성심으로 DJ 납치사건을 만들면서 권력 밖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하지만 처세의 달인 HR은 신군부와 문민정부의 등장, 김대중의 집권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천수를 누리고 2009년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울산은 정주영 회장과 HR에게 빚을 많이 졌다. 경쟁상대 포항을 제치고 울산에 국가공단을 유치하고, 울산공고와 학성고, 울산공대(울산대학교)를 만든 이가 HR이다. 경호실장이었던 피스톨 박종규가 고향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고 박정희 대통령이 구미에 공단을 만들었듯이, 자신의 고향 울산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떡 만지는 말더듬이" 이후락. 그의 생가와 별장은 그의 고향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학성 이 씨 집성촌에 있다. 울산의 3대 명당 중 한 곳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명절이면 온갖 고관대작들이 돈보따리 들고 머리를 조아리려 줄을 서던 바로 그 별장이다.
이제 주인이 바뀌어 화려했던 건물은 허물어지고 새 건물이 지어졌지만 담장만은 그대로란다. 실제 생가는 허물어져 가난했던 좁은 터로만 남아있고, 실제 생가터 옆에 이후락 생가라고 써붙여놓은 옆집은 팔려고 내놓은 상태였다. 집을 기웃거리니 집주인이 구석구석 안내해 주면서 싸게 드릴 테니 사두시란다. 길이길이 명당인 자리라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