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을

ep.03

by 추설

"...왜요?"

"그냥요. 술도 좀 깨고. 바람도 쐬고."

사실은 그가 궁금해져서 그와 좀 더 있고 싶어서였다.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쪽이 그러고 싶다면요."

무심한 대답이었지만, 거절은 아니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편의점에서 맥주나 사서 갈까요. 제가 살게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봤다.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물었다.

"...또 술이요?"

"오늘은 금요일이니까요."

그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작은 웃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심장이 또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샀다. 공원으로 돌아왔다. 벤치에 앉자 나무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이 짙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어딘가 씁쓸한 바람

그는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봤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희미하게 닿아 있었다. 주황빛이 창백한 피부 위로 번졌다. 속눈썹 그림자가 볼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왜인지 오래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맥주를 건네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쪽은 고민 같은 거 없어요? 결국 프리랜서라는 건데... 수입이라든가."

그가 캔을 받아들이며.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있죠. 고민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맥주 캔을 따 한 모금 마신 뒤, 그가 멀리 보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되게... 직업, 돈 얘기 많이 하시네요."

나는 당황했다. 들킨 기분이었다.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고민이에요? 고민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티가 나나 봐요. 말하면 뭐, 들어줄 건가요?"

그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뭐, 말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말해봐요. 오늘, 오랜만에... 꽤 재밌는 시간이었으니까. 고민 정도는... 들어줄게요."

그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 어딘가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재밌었다니. 이 까칠한 사람 입에서.

"그거 참 고맙네요. 재밌었다니까."

나는 맥주를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쓴맛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냥... 별거 없어요. 남들 다 하는 고민이에요."

그는 말없이 기다렸다.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샛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가로등 빛이 스며들었다.

"…사는 게 힘들어서요."

나는 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형편은 빠듯하고, 혼자 사는 건 익숙해지질 않고. 직장 일은 늘 벽 같고, 월급은... 늘 모자라고. 쳇바퀴 같은 삶. 그렇네요."

말하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말이 술술 나왔다. 그가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흠... 힘드시겠어요. 전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후에 말을 잠깐동안 기다렸다가 물었다.

"끝? 끝이에요? 설마, 그게 위로예요?"

그가 멈칫했다.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 미안해요. 누굴 위로해 본 적이... 없어서요."

나는 맥주를 마시며 웃었다. 솔직한 사람이었다. 어설프게 위로하는 척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괜찮아요.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근데 이상하게, 그런 말이... 위로가 되긴 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나는 벌써 다 마신 빈 캔을 굴리며 말을 꺼냈다. 술기운 때문인지, 입이 가벼워졌다.

"사실, 저... 부모님도 안 계세요. 그래서 어디 말할 곳도 없어요. 그냥... 부모님한테 투덜거리는, 뭐 그런 거요. 그게 없으니까, 가끔은... 숨이 막혀요."

그가 바로 대답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그건 괜찮아요. 저도 없어요. 부모님은."

그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마음이 쓰였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괜히 얘기를 꺼낸 걸까요? 너무 무거운 얘기였죠?"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봤다. 목선이 드러났다. 마른 목. 창백한 피부.

"아니요. 부모님이 없다는 게... 무거운 얘기인가요?"

나는 가만히 봤다.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동시에, 이상하게 끌렸다.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긴 하네요."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네? 뭐가요? 뭐... 고민한다고 부모님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부모님이 없는 게... 원망스러운 거예요? 아니면, 지금 힘드니까 그 생각까지... 미치는 거고?"

말문이 막혔다. 무심한 말투였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 괜찮다고, 그런 거라고. 그냥 담담하게.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이 사람 앞에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네요."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쪽, 뭐 사진가인지 예술가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사람 마음 잘 읽네요."

"됐어요. 거창한 말 들으려고 말한 거 아니니까요."

나는 뭔가에 끌리듯 그를 봤다. 빈 캔을 쥔 채, 아무 말도 못한 채로.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게 뭘까. 이 감정이 뭘까.

그때 그가 꽤 시끄러운 소리로 말했다.

"어? 별이네요. 서울에서도... 별이 보이네요."

나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디요? 진짜 보여요?"

그가 손끝으로 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길었다. 마디가 앙상한.

"저쪽."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뭔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그건, 위성이에요. 그러면 그렇지. 이 도심 한복판에서 별이 보일 리가."

나는 한숨을 쉬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와 나는 잠시동안 아무 말없이 그곳을 보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달랐다. 아까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그래도 예쁘잖아요. 별이나 위성이나, 어차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빛나면... 그걸로 충분하죠."

그의 말은 어딘가 이상하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위성이나 별을 보는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뭔가 다른 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 아주 먼 곳을.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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