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을

ep.04

by 추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위성이나 별을 보는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뭔가 다른 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 아주 먼 곳을.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그쪽...생각보다 그런 감성적인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네요."

"...무슨 말이요?"

"그냥… 예술 하는 사람답다고 생각했어요. 확실히, 말이 좀 다르긴 하네요."

그가 시선을 내렸다. 표정이 굳었다. 처음으로, 목소리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구분하지는 마세요."

잠깐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

"'다르다'는 말, 저한테는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거든요."

나는 말을 잃었다. 조금 전에 위성을 말하던 그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날카롭다기보다는... 어딘가 아픈 상처가 있어보이는 말이었다.

"미안해요. 그럴 뜻은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나도... 예민하게 반응했네요. 별일도 아닌데 괜히... 불쾌하게 굴었네요."

말은 단조로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달랐다. 나는 그 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가 무심한 얼굴 아래에 감추고 있는 진짜 마음을.

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 밤은 더 깊어졌고, 벤치 아래로 떨어진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찬 공기가 볼을 스쳤다.

"저기...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실례인 걸 알면, 안 하는 게... 낫지 않아요?"

말문이 막혔다. 입술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그런 나를 보더니, 그가 눈치를 보듯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잠시 조용한 정적. 환풍기 소리도, 고양이 울음소리도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지는 사람처럼 그가 말했다.

"...알았어요. 물어보세요. 대체 뭘 그렇게 궁금해하는 건지, 나도... 궁금하니까."

그 말에 조금 마음이 풀렸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 조심스레 말했다.

"뭐가 그렇게...재미가 없고 싫증이 났어요?"

그가 나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가 가로등 빛을 희미하게 반사했다.

짧은 정적 끝에, 그가 웃지도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요. 목표를 잃은 느낌이랄까"

맥주 캔을 한 번 돌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자세하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기대가 큰 만큼 사람들에게 실망도 많이했지만. 어디를 가도 저를 좀 다르게 보더라고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어들 사이에 어딘가 부러진 감정이 걸려 있었다. 오래된 상처 같은. 단순 사춘기때 겪는 ‘나는 남들과는 다르다’ 이런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음..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말보다 침묵이 더 적절했다. 그의 말에 대답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쪽이 좀 신기하게 보였던 거네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실례일 수 있지만, 부러워요. 저는 너무 평범했거든요. 남들 다 하는 생각, 남들 다니는 직장,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 그게 전부였어요. 꿈이 뭐였는지도 기억 안 나고... 그냥,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말을 마치고 나니 아무 반응이 없어 괜히 꺼낸 말인가 싶었다. 너무 무거웠나. 시선을 내리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그런 말은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에요."

목소리가 낮았다. 하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죽지 못해 살아도, 어쨌든... 사는 거니까. 그렇다고 정말 죽을 건 아니잖아요?"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한쪽을 응시하며, 웃는 듯 마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요... 부럽네요. 세상이랑 부딪히려는 용기, 그런 삶. 멋져 보여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고, 시선이 위로 향했다. 구름 너머 어딘가를 오래 바라보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저도 그쪽이... 부러운데요. 남들과 같은 삶을 산다는 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거."

"아뇨. 그건 그냥... 안주하는 거예요. 달라지고 싶은데, 무서우니까. 그래서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는 거고요."

그가 한참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그런가요. 사과해야겠네요. 나도 괜히... 구분 지어버렸네요. 누구든 나름의 어려움은 있겠죠.”

나는 피식 웃었다.

"꽤 괜찮은 말을 할 줄 아네요, 그쪽이? 역시, 사람은 술 마시면 말이 많아지긴 하나 봐요."

그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시끄러워요. 그냥, 단지... 미안했을 뿐이에요."

그의 날카로운 대답에 왜인지 웃음이 났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날카로운 건 여전하네요."

"내 성격이... 그런가 봐요."

갑자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저기요."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가 짧게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평소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부딪혀봐요, 세상이랑."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아까 그쪽 말... 좀 오글거리긴 했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괜찮았어요. 진심 같았고, 꽤 멋졌어요."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부딪혀봐요. 그럼... 지금보단 덜 평범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평소보다 말이 길었다. 진심이 담긴 건지, 술기운 때문인지.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긴 속눈썹, 얇은 입술. 가슴이 뜨거워졌다. 왜인지 얼굴이 뜨거워져 눈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내가 말하고도 좀 민망하긴 했어요."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었죠. 근데 뭐, 저 같은 사람이 부딪힌다고 세상이 바뀌겠어요?"

"평범하면 뭐, 세상이랑 부딪히면... 안 돼요?"

"시간이 없어요. 뭘 해보고 싶어도, 늘 시간이 부족해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근데, 나랑 이렇게 앉아 있을 시간은... 있잖아요."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캔을 만지작거렸다. 들킨 기분이었다.

"그러게요. 그건... 맞는 말이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발끝으로 굴러왔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건 뭐예요?"

"이제야 묻네요. 근데요, 말했잖아요. 뭐가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요."

"그랬죠. 미안해요. 그럼, 지금은 무슨 일 해요?"

"아 이제 궁금하신가요? 그냥... 회사 사무직이에요."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훌륭한 일이네요. '평범한 일'이란 건, 사실... 없는 거잖아요. 누군가에겐 흔해도, 다른 누군가에겐 특별할 수도 있으니까."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감동적이네요. 꽤 따뜻한 말들을 많이 해주네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정말."

"지금, 부끄러운 거예요?"

"뭘요. 부끄럽긴. 그보다 술 다 마셨잖아요. 슬슬... 일어나죠."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43분인데요? 이게 늦은 시간이에요?"

"아뇨. 내 기준에도... 아직 이른 편이죠. 그렇다고 또 술 마시러 가기엔 좀... 피곤하고."

"금요일이에요. 회사원한텐 이상하게 힘이 남는 날이거든요."

"제 의견은... 안 중요하다는 거네요."

"정답이에요. 일어나요."

우리는 말없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볼에 차가운 감촉이 스쳤다.

"...비네요."

그가 고개를 약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게요. 방금까진 별이 보였는데... 아, 위성이었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질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이쪽으로요!"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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