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을

ep.05

by 추설

지난화 마지막:

"...비네요."

그가 고개를 약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게요. 방금까진 별이 보였는데... 아, 위성이었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질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이쪽으로요!"


ep.05

나는 그를 따라 공원 안쪽 정자로 뛰어들었다. 낡은 지붕 아래, 두 사람의 숨이 고르게 섞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달려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그는 소매로 얼굴의 빗물을 훔쳤다. 셔츠는 이미 젖어 있었고,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무심코 그를 바라보았다. 젖은 옷, 흘러내리는 물방울, 낮은 숨소리. 시선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그가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쳤다. 들킨 느낌이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얼른 눈길을 피했다.

"...비, 생각보다 많이 오네요."

"그러게요. 지금은 어디 가기도 애매하죠."

정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웠다. 그와 나, 단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잠시 뒤, 그가 작게 기침을 했다. 깊고, 젖은 숨이 섞인 소리였다.

"저기요… 혹시 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원래 자주 이래요. 잔기침이에요... 그냥."

나는 조금 안심한 듯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비가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네요. 집은… 어디세요?"

"전 집이 꽤 가까워요. 걸어서... 40분쯤?"

"…걸어서 40분이요? 그게 가까워요? 이 근처 사는 줄 알았는데요."

그는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40분이면 가까운 거죠. 원래 걷는 거 좋아해요. 동네 구경도 할 겸"

나는 짧게 웃었다.

"역시… 특이해요. 그래도 그 얇은 셔츠는…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옷인데요."

"괜찮아요. 하늘에서 옷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요… 택시 타시는 건 어때요?"

"괜찮아요. 걸어가는 게 정말 좋아요."

"저 사실 집이 가까워요. 잠깐 몸이라도 녹이고 가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휘둥그레진 눈동자를 봤다. 그와 나는 몇 초 동안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새 부끄러워져 황급히 덧붙였다.

"아!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정말 그냥, 따뜻한 데서 잠깐만... 몸만 녹이고 가시라고요."

그의 커진 눈동자는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은 정적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흠흠..저는, 다른 사람 집에서 자본 적 없어요. 그리고... 모르는 사람을 집에 그렇게 들이셔도 되는 거예요?"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쪽이라면 그럴 법하죠. 근데요, 우리 꽤 자주 마주쳤잖아요. 모르는 사람까진 아니죠. 그리고요, 자고 가라고 한 거 아니에요. 몸만 녹이고 가라고요."

"아니… 진짜 괜찮아요. 앞에 편의점 가서 우산 사면 되니까요."

나는 숨을 짧게 내쉬고, 단호하게 잘랐다.

"됐고요. 따라와요. 그렇게 젖어서 거기까지 어떻게 갈 건데요. 택시도 안 탈 거라면요, 그쪽은?"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독불장군이시네요."

"하여간, 꼭 그렇게 말을 밉게 해요."

"아… 네. 맘대로 생각하시죠…"

말끝이 흐려졌지만 거절은 아니었기에 안심이었다.

"휴, 일단 가요. 비가 약해질 기미도 없고."

우리는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잔잔히 내렸고, 어두운 골목을 따라 원룸 건물 1층 현관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지금, 본인 얼굴 엄청 웃긴 거 알아요? 막 씻긴 고양이 같아요."

"하… 미안한데, 그쪽은 더하거든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생활의 온기가 남아 있는 조용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 옆 작은 공간엔 침대가 놓여 있었고, 전등 불빛이 벽면을 따라 부드럽게 퍼졌다. 한눈에 들어오는 1.5룸.

나는 가방을 내려두며 말했다.

"집이 좀 좁죠? 그냥 혼자 사는 직장인 방이에요."

"뭐 다 그렇죠 제 집이랑 별반 차이 없어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네요."

나는 옷장 앞에서 수건을 꺼내 건넸다.

"젖은 거 너무 신경 쓰지 말고요. 저기 앉아요."

수건을 받은 그는 조용히 머리를 닦은 뒤,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 네. 그보다 고맙네요. 낯선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까도 말했잖아요. 우리 꽤 자주 봤던 사이라고. 그리고, 고마운 건 저예요. 오늘 시간 내줘서."

그는 어깨를 한 번 움찔이며 말했다.

"귀찮았던 건 사실이긴 한데… 나쁘진 않았어요. 사람이랑 이렇게 이야기한 게,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오랜만이라니.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쁘진 않았다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그보다…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게 오랜만이라는 말, 프리랜서라 그런 건가요? 아니면, 그냥…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지."

"둘 다예요. 일하면서 누구 만날 일도 없고, 관계는... 제가 끊었고요."

한 박자 쉬고는 말을 이었다.

"공원에서도 말했잖아요. 별로인 사람이 많았어요. 그리고 제가 먼저 말 거는 성격도 아니고요. 아니면 내가 별로인 사람일 수도."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주제를 돌리려고 급하게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하나는 그의 앞에, 하나는 내 자리로.

"미안해요. 집에 이런 것밖에 없어요. 그럼… 친구 같은 건 아예 없어요?"

"있을 리가요. 계속 말했잖아요. 제가 그런 타입으로 보여요?"

그리고 짧게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보다 또 술이네요. 으윽."

나는 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럴 리 없죠. 절대 친구 많아 보이진 않으니까요.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아까 술집에서 짠 한 번도 안 했더라고요."

"하, 그거 참 듣기 좋네요. 친구 없어 보이는 타입. 그래요, 짠이나 하죠."

짠—

그와 나는 오늘 처음으로 잔을 맞댔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저랑 친구할래요?"

"아뇨. 전 친구 같은 거 안 만들어요. 이제는 우정이니 뭐니, 그런 말 들으면 좀... 답답하거든요."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은 상하지 않았다. 단 한가지 걸리는 건.. ‘이제는’이라는 단어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아웃사이더, 딱 그 느낌."

"음, 그런 느낌이죠."

나는 맥주 캔을 내려두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 기가 막히네요. 제가 이렇게 말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네? 맞는 말인데요. 굳이 기분 나쁠 이유가... 없어서요. 맞는 말이니까..?"

그는 맥주 캔을 조용히 내려두고 말했다.

"그보다… 비도 거의 그쳤네요. 이만 가볼게요. 고마웠어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 갑자기요? 아니 이제 집에 왔는데요..?
아직 완전히 그친 것도 아니고… 조금 더 있어도 괜찮은데요."

그는 대답 없이 천천히 일어나, 현관 쪽으로 향했다.

"아니요. 더는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럼, 잘 지내세요."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저기요."

"…네?"

"그... 혼자 있기 좀 무서워서요. 비도 오고…"

"…비 오는 게 왜 무서운데요?"

"그냥… 천둥이 칠 수도 있고요. 여자 혼자 살다 보면 괜히… 그런 게 좀 불안하잖아요."

"천둥은 안 쳤잖아요. 도어락도 있고, 이중 잠금 장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럴 수가... 있나요…?"

나는 결국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없겠죠! 근데 왜 내가 이런 말까지 하겠어요! 정말… 답답하네요."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숨을 고르며, 힘없이 덧붙였다.

"…그냥 자고 가요."

"네!? 아니요, 절대 그럴 순 없어요. 좀 빈약해 보여도 저도 남자고요. 그리고… 전 남의 집에서 자 본 적도 없고, 특히 여자 집은… 더더욱 없어요."

"아니,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그냥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요. 일 아니면 집이고, 저도 그렇지만 친구들도 다 바빠서… 누굴 만나는 게 점점 어려워져서요."

그는 말없이 가만히 서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하나만 약속해요."

"…네? 무슨 약속인데요?"

"저한테 화 안 내기로 약속해요."

"네…? 화를 왜 내요, 갑자기?"

"일단 약속해줘요."

"네, 알겠어요. 화 안 낼게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현관 앞으로 걸어가,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끌었다.

"에? 에, 뭐 하시는 거예요. 신발이… 아직—"

"괜찮아요. 그냥 들어와요."

"잠깐만요, 신발만 벗고요!"

쿵—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는 신발 한 짝을 문 앞에 남긴 채, 몸만 방 안에 쭉 뻗은 채 누워 있었다. 마치 개구리처럼.

"…괜찮아요?"

"하아… 그래서 그 약속을 먼저 받아둔 거였군요. 사람 넘어뜨리려고?"

"뭐,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닌데요."

"진짜 별일 다 겪네요, 오늘."

나는 웃으며 짧게 말했다.

"…미안해요. 진짜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뭐, 괜찮아요. 근데 이게 무슨 상황이죠?"

"…아니, 그러니까… 혹시, 그쪽 바보예요?"

"네? 끌어당긴 건 그쪽인데, 왜 제가 바보가 되죠?"

"이상한 사람은 본인이죠. 밖에 나가서 물어봐요."

"예예, 그러시겠죠. 그래서, 뭐예요?"

"뭐가요? 그냥… 장난 좀 친 거죠."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요. 가볼게요."

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좀 그냥... 자고 가요! 제가 혼자 있기 싫다 그랬잖아요."

그는 잠시 멈춰 뒤돌아본 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모습과 함께 내가 무슨 소리를 계속한 건지..더 이상은 막무가내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괜찮아요. 역시 자기 집이 제일 편하겠죠. 정말 미안해요, 괜히 붙잡아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져서 기뻤던 것 같아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여자 집에 이렇게 와 본 것도 처음이고, 아 물론.. 뭐 정말 처음은 아니지만 아니, 뭐랄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그의 걱정되는 표정과 순수한 마음에

"뭘 어떻게 해요. 여태 잘만 있었으면서. 일단 씻고 와요. 씻고 와서, 남은 맥주나 마저 마시자고요."

"또 술이요…? 근데 입을 옷도 없고… 욕실 써도 돼요?"

"그쪽은 남자치고 마른 편이니까, 제 옷이 그렇게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편한 거 줄게요."

"아… 네. 그럼, 실례 좀 할게요."

그는 욕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무심히 말을 덧붙였다.

"저기요. 수건이랑 옷은 안 가져가요?"

문이 다시 살짝 열렸다. 그가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아… 그러네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조용히 수건과 옷을 건넸고, 그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곧 욕실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식탁에 앉아, 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김 빠진 맛.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평소라면 우중충했을 풍경인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웠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내가 미쳤나.'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이 상황을 만든 건 나였고, 그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도… 나였으니까.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따뜻한 김이 먼저 나왔다.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 내 흰색 무지 반팔티에, 분홍색 수면 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 쪽엔 작고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

"다행이에요. 작진 않네요. 근데… 아까랑 다르게, 바지가 좀 귀여워지셨네요?"

그는 멈칫하더니, 수건을 내렸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아… 이거, 다른 거 없어요?"

"없어요. 그게 제일 큰 거예요."

나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그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나는 맥주 캔을 건네며 말했다.

"자, 마저 마셔요."

"...고마워요. 진짜로."

"뭐가요?"

"그냥... 다요. 비 맞은 사람 집에 들이고, 옷까지 빌려주고. 쉬운 일 아니잖아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도 오늘 혼자 있기 싫었다고. 그러니까 빚진 거 없어요."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캔을 한 모금 마신 뒤, 창밖을 봤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편한 침묵이었다.

"저기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젖은 옷이요. 건조대에 널어둘게요. 주머니에 뭐 있으면 빼놔요."

"아... 네."

그가 아까 벗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휴대폰, 그리고 뭔가 구겨진 종이 몇 장. 종이를 꺼내는 순간,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나는 무심코 주워 들었다. 영수증이었다. 글씨가 빼곡했다.


writer: 추설

Instagram id: sc28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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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jpg 작품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세상에 없던 색』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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