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을

ep.06

by 추설

지난 화 마지막:

"그냥... 다요. 비 맞은 사람 집에 들이고, 옷까지 빌려주고. 쉬운 일 아니잖아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도 오늘 혼자 있기 싫었다고. 그러니까 빚진 거 없어요."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캔을 한 모금 마신 뒤, 창밖을 봤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편한 침묵이었다.

"저기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젖은 옷이요. 건조대에 널어둘게요. 주머니에 뭐 있으면 빼놔요."

"아... 네."

그가 아까 벗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휴대폰, 그리고 뭔가 구겨진 종이 몇 장. 종이를 꺼내는 순간,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무심코 주워 들었다. 영수증이었다. 글씨가 빼곡했다.




ep.06

한글이 아니었다. 일본어.

"이거... 일본 영수증이에요?"

그가 멈칫했다. 내 손에 든 종이를 보더니, 얼른 받아 들었다.

"아... 네. 그냥, 여행 갔을 때... 거기서 받은 거예요."

말끝이 흐려졌다. 익숙한 뜸. 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일본 자주 가요?"

"... 가끔요."

짧은 대답. 더 묻지 말라는 뉘앙스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구나. 저도 언젠간 가보고 싶어요. 일본 여행. 전에는 가고 싶었는데 못 갔거든요."

"... 그냥 그런 곳이에요. 여기랑 다를 게 없는데요 뭐"

어눌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조금은 슬픈 눈을 하고는.

나는 젖은 옷을 건조대에 널면서 생각했다. 일본 여행. 이 사람,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묻지 않기로 했다. ‘혹시 일본인이었던 여자친구한테 차인 걸까?’

"… 아까는 당황해서 못 봤는데…"

그가 눈을 피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꽤나… 어울리지 않으시게 귀여운 잠옷을 가지고 계시네요."

그가 고양이 프린트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미안한데, 저도 여자거든요? 분홍색에 귀여운 고양이… 찍어도 돼요?"

"…아, 정말. 왜 이러세요."

나는 장난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왜요. 그러지 말고 한 장만. 이런 것도 인연이잖아요?"

"그러세요. 보답까진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해주신 분한텐— 뭐, 이 정도쯤은... 성의라고 생각할게요."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었다. 셔터 소리가 몇 번 울렸다. 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식탁 아래로 몸을 낮췄다.

"참나, 이미 다 찍혔거든요? 사진은 그렇게 많이 찍더니, 정작 본인은 찍히는 거엔 약하시네요."

"후... 저는 제가 찍히는 건 좀… 부끄러워서요. 되도록이면… 지워주시죠."

"제가요? 왜요, 싫은데요. 평생 간직할 건데요?"

"하… 참. 뭐, 알겠어요. 대신, 아무한테나 보내진 말아요."

"그쪽이 뭐가 예뻐서요. 남한테 보여줄 정도는 아니거든요?"

"말을, 정말 곱게는 못하시네요."

"그 말, 돌려드릴게요."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티격태격하다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곧 조용해졌다.

그가 먼저 말했다.

"뭐… 술 마시기로 했으니까, 일단 술부터 마실까요?"

나는 냉장고를 열어 다식은 캔맥주를 집어넣고 새롭게 캔맥주를 꺼냈다. 캔이 가볍게 부딪혔다. 우리는 이런저런 시시한 얘기를 이어갔다. 별 의미 없는 말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다.

그러다, 나는 결국 그 말을 꺼내버렸다.

"그쪽은… 연애 같은 건 안 해봤어요?"

그는 잔을 만지작거리다,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 저를 무슨, 감정 없는 바보쯤으로 생각하시나요? 연애는 많이 해봤죠. 재미는… 없었고요."

"…네? 그쪽이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요?"

"셀 수도 없을 만큼 해봤는데요. 다 기억 못 할 뿐이지. 말했잖아요. 재미없었다고."

재미가 없었다는 말. 장난처럼 들렸는데, 어딘가 마음이 저릿했다.

"그쪽은요?"

"네?"

"연애요. 그쪽은 안 해봤죠?"

"당연하죠. 그쪽도 저를 감정 없는 바보로 봤나 봐요? 저도 연애해 봤거든요? 그것도 작년에? 지금이야 뭐… 일에 치여 살다 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알았어요. 그렇다고 뭐 기죽을 필요는 없지요."

“누가 기죽었다고 그래요!”

한바탕 티격태격 거린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취기 때문인지 그와 좀 더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요, 저기 그…"

"네?"

"괜찮으면… 저라도 괜찮다면, 친구 할래요? 아까는 아니라고는 대답했지만.."

그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아뇨? 아까 말한 그대로예요"

"참나.. 나름 용기 내서 말한 건데, 생각도 안 해보고 대답하기 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정말 그런 건 필요가 없는걸요."

"그쪽은 친구가 필요 없는 게 아니고,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으니까 필요 없다고 하는 거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있었어요. 친구. 연애도 해봤다니까요?"

나는 이미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해서,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안 믿어요. 그러니까, 저랑 친구 해요. 친구가 싫으면 아는 사람으로라도 자주 만나고요."

"그게 뭐예요. 제가 볼 땐, 그쪽이 정말 신기한 사람이에요."

"그쪽만큼 신기한 사람은 전 본 적도 없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하기로 한 거예요."

"취했네요, 그쪽. 뭐, 맘대로 생각해요."

"그리고 그보다… 그쪽 이름은 뭐예요? 우리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가 맥주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름은 비밀이에요."

"네? 이름조차 안 알려준다고요?"

그가 말한 대답 중에서도 가장 어이가 없는 대답.

"안 알려주고 싶은 건 아니고… 이름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말끝이 흐려졌다. 익숙한 뜸.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진심이 섞인 것 같았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기는 게 아니었다. 이 남자가 나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는 거였다.

"그거 알아요? 그쪽이 했던 말 중에 제일 어이없는 말인 거. 이름에 트라우마라니.."

그도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근데 정말이에요. 그리고 이름을 서로 알면… 정이 붙을 것 같아서요."

"이혜은. 저는 이혜은이에요."

"네?"

"제 이름은 이혜은이라고요."

"그렇군요… 예쁜 이름이네요."

"예쁘긴요. 그쪽이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진 몰라도… 그냥 흔한 이름인데요."

"흔하다고 안 예쁜 건 아니니까요. 저는.. 음.. 아직은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쪽이 거짓말할 사람 아니라는 거 저도 아니까요. 그래도, 나중에라도 알려줘요."

"오. 그쪽, 생각보다 꽤나 남을 배려해 주는 사람이네요."

"그쪽이 아니라 혜은이라고요."

그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가요. 이름을 부르는 게 아직은 좀 그러네요."

"그냥 편해질 때 부르세요. 됐고, 연락처나 좀 알려줘요."

서로 번호를 교환했고, 그에게 내 명함까지 건넸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다음 주에 미뤄둔 휴가를 쓰게 됐다는 걸.

"근데 그쪽… 다음 주에 뭐 해요?"

"안 합니다. 아무것도. 일도 당분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그럼… 저랑 시간 보내는 건 어때요?"

그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 오늘 같은 날처럼, 또 보자는 건가요?"

"네… 그냥.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그런 거요."

"며칠이나 쉬는데요?"

"화요일부터 그 주는 다 쉬어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표정이 서서히 창백해지고, 감정이 가라앉았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 무표정 그대로였다. 취기 때문인지 가슴이 묵직해졌고, 이상하게도 싫어 보이는 그의 표정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애써 말을 꺼냈다.

"같이 안 보내고 싶으면 괜찮아요. 무리한 부탁이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뭐. 같이 보내요."

예상 밖의 대답에 오히려 내가 멍해졌다.

"… 정말요?"

"네. 마침 가고 싶은 곳도 있고요. 괜찮으면, 같이 가요."

"네?"

"친구라면요. 여행도 가고, 시간도 같이 보내고… 그런 거 하는 거 아닌가요?"

"여행이요? 저랑요?"

"네. 싫으면 안 가도 되고요."

"가요! 꼭 가요! 너무 좋아요! 그보다… 어디 가는데요?"

"모지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모지코요?"

"모・지・코. 일본에 있어요."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 해외를 간다고요?"

"네. 가고 싶어서요. 해외는 좀 그렇나요?"

"아뇨, 좋아요. 근데… 갑자기 해외라니. 그쪽은, 정말 신기한 사람이네요. 가요. 고마워요. 데려가 줘서."

"저야말로 고맙죠. 혼자 가봤자 우울했을 텐데, 둘이면 좀 나을지도 모르니까."

"… 우울했을 거라니요?"

"그냥요. 원래 좀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 말에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꼭 가는 거예요."

"아무리 제가 이상해 보여도, 그 정도로 아무 말이나 하진 않아요."

그 후로도 우리는 맥주캔을 몇 번 더 부딪혔고, 짧은 틈마다 모지코라는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철도와 바다, 오래된 건물, 복고적인 거리들— 그가 왜 그곳에 가고 싶냐는 내 질문에는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냥, 가보고 싶은 곳이라서요."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지금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의 불을 끄고, 나는 침대 위로 조용히 몸을 눕혔다. 그는 내가 건넨 얇은 이불을 깔고 바닥에 누웠다. 어둠이 퍼진 천장, 창밖에서 빗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스쳤다.

"지금도… 깨어 있어요?"

"네."

"바닥, 불편하진 않아요?"

"괜찮아요. 익숙하니까요."

그가 작게 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따뜻한 물이라도 줄까요?"

"아뇨, 원래 잔기침이 많은 편이라서요."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상하죠. 서로 낯선 사람들이 이렇게 금방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하고, 같은 방에서 자고…"

"그러게요. 저도 그래요."

"그래도… 나쁘진 않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용한 공기가, 이상하게 따뜻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숨이 턱 막혔다. 목까지 차오른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writer: 추설

Instagram id: sc28zs

https://www.instagram.com/sc28zs/

표지지.jfif 작품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세상에 없던 색』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444521


수, 일 연재
이전 06화모지코에서 가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