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7
지난 화 마지막:
"이상하죠. 서로 낯선 사람들이 이렇게 금방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하고, 같은 방에서 자고…"
"그러게요. 저도 그래요."
"그래도… 나쁘진 않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용한 공기가, 이상하게 따뜻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숨이 턱 막혔다. 목까지 차오른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ep.07 ( 2장. 이상한 만남 마지막 화.)
그의 얼굴이— 그러니까, 이름도 모르는 이 남자의 얼굴이 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멈췄다. 혹시라도 그가 깰까 봐, 조심스레 숨을 죽였다. 그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고른 숨결, 미동 없는 어깨, 부드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이마부터 콧날, 입술까지 조용히 정돈된 얼굴선.
……예쁘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느낀 건 아마 처음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 그가 눈을 반쯤 뜨며 중얼거렸다.
"……음? '네?'가 아니고요. 지금 왜 여기 계시죠…?"
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얼른 등을 돌렸다.
"그쪽, 바닥이었잖아요. 언제 여기까지 올라온 거예요?"
"제가 올라온 게 아니라, 그쪽이 내려온 거죠."
순간, 딱딱한 바닥감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내가 굴러 떨어졌구나.
"아니, 그게… 오해하지 마요. 그냥 술 마시고 피곤해서 자다가 떨어진 것 같아요."
"근데요. 그쪽, 아침부터 남자 얼굴 빤히 보는 건… 좀 그렇네요."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니, 누가 그쪽 얼굴 예쁘다고 일부러 봐요! 그리고 이 일은 비밀이에요!"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말할 곳도 없어요. 이럴 때 친구가 있으면 바로 말했을 텐데."
"참, 어이가 없네요."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몸을 돌려 내게 등을 보였다. 마르다 못해 가냘파 보이기까지 한 등. 묘하게, 외로움이 묻어나는 등.
"……장난이에요. 장난."
나는 그의 등을 툭, 가볍게 쳤다.
"장난도 정도껏 해야죠."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장하러 갈래요?"
"……흠. 네?"
"그만 좀 누워 있고, 밥 먹으러 가자고요."
맑은 국물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해장국을 바라보던 나는, 숟가락을 들고 겨우 말을 꺼냈다.
"……살겠다."
"그러게요..”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숙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처 괜찮은 데로 제가 찾아서 예약할게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그리고… 여행 경비는 제가 보내드릴게요."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됐어요. 가서 밥이나 한 끼 사요. 형편도 안 좋다면서"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됐어요, 비싼 거 얻어먹을 거니까요”
나는 괜히 작게 웃었다.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정말 고마웠다.
그는 핸드폰 화면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예약 끝났어요. 이 비행기 타면 돼요."
"근데요, 모지코 간다면서… 왜 후쿠오카로 가요?"
"하아… 후쿠오카에서 모지코로 이동해야 해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죠."
"네. 제 잘못이네요."
그렇게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며칠이 지나, 약속했던 날의 아침이 되었다.
공항에서 마주한 그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늦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쪽도 꽤 일찍 왔네요? 막상 가려니 설렜나 봐요?"
"설레기는요. 애도 아니고, 그냥 가니까 가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한참 동안 우리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그도,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구름을 뚫고 내려오자, 창 아래로 파란 바다가 펼쳐졌다. 그때 혼잣말로 그가 말했다.
"오랜만이네"
그 후 착륙 안내 방송이 들렸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 입국심사를 받은 뒤 공항 로비까지 왔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사무실을 탈출해 해외를 왔다는 생각에 아이처럼 들떴다.
"저기요, 저기요."
그는 캐리어를 끌며 나를 힐끔 돌아봤다.
"왜요?"
"우리 이제 진짜 일본에 왔네요. 너무 신나요."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요."
그는 공항 안내판을 힐끗 보더니,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마치 여기가 익숙한 사람처럼. 나는 그 뒤를 따라가다 물었다.
"그쪽, 여기 꽤 많이 와봤어요? 길도 안 보고 가네."
그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 후.. 일본 몇 번 와본 사람이면 길은 다 알죠. 한국어도 다 써져 있잖아요."
얼버무리는 말투.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전 여자친구가 일본인임에 틀림이 없다’
"참나 알겠어요."
그는 시계를 슬쩍 확인한 뒤, 조용히 말했다.
"일단 모지코까지 바로 이동할 건데, 괜찮죠?"
"근데… 우리 새벽부터 움직였잖아요.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요."
의외로 그는 가볍게 끄덕였다.
우리는 공항 1층 카페로 향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카운터 앞에 섰다. 그러고는 익숙한 일본어로 주문을 시작했다. 이 사람이 일본어를 이렇게 유창하게 할 줄이야. 어쩐지, 모르는 얼굴을 보는 기분이었다.
다만— 가게 점원이 워킹홀리데이로 온 한국인이라는 게 유감이었다.
"한국인이세요? 아메리카노 두 잔으로 드릴게요."
그는 괜히 민망한지, 턱을 만지며 말했다.
"괜히 일본어로 말했네요."
"아뇨, 멋있었어요. 새로운 모습 봤네요. 공부를 잘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못하긴 했어요, 도통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뭐”
나는 그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어서 말했다.
"근데, 일본어는 왜 그렇게 잘해요? 어릴 때 배웠어요?"
"네. 관심이 좀 있어서 오래 공부했어요."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 맞다. 그래도 그쪽이 어디를 갈 건지는 말은 해줘야 하니까. 모지코는 기타큐슈에 있어요. 고쿠라에서 환승해서 갈 거고요”
"참나 그 정도는 저도 알아왔다고요"
"네 잘했네요, 아주."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꽤 거리가 있는 곳이다 보니까 잘 안내해 줘야 해요"
그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말 안 들으면 그냥 두고 갈게요”
“말을 참..”
우리는 커피를 다 마시고, 하카타역으로 향했다. 하카타역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그는 마치 오래 다닌 사람처럼, 주저함 없이 길을 찾아 나섰다.
"근데 우리 뭐 타고 가요?"
"신칸센이요."
"그게 뭔데요?"
"KTX 같은 거요."
플랫폼에 도착하니, 멀리서 신칸센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하얗고 매끄러운 차체. 우리는 조용한 좌석에 앉았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하자마자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갔다.
"고쿠라까지는 금방이에요."
그의 말이 이상하리만치 차갑게 들렸다. 그 말 이후로, 우리는 다시 말이 없었다.
나는 결국 이 기류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요. 근데 그쪽, 일본어는 왜 그렇게 잘해요? 공부는 진짜 안 할 것처럼 생겨서는."
"참나… 어이가 없네요. 그냥 관심 있어서 한 거라니까요"
"아니, 진짜 그렇잖아요. 그렇게 막힘없이 외국어를 하려면 뭐, 워킹홀리데이? 아니면… 유학파?"
"뭐 같은데요?"
나는 한순간 스친 생각을 던져버렸다.
"… 역시 전 여자친구가 일본인!?"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이마 근처가 미묘하게 움찔하더니,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절대 아니니까요. 억측은 그만하죠. 그냥 어릴 때 관심이 좀 있어서 오래 공부했었어요."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흘리며, 느릿하게 말을 덧붙였다.
"겨우 생각한다는 게 그런 거라니 대단하시군요. 역시"
그 말에 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그렇게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신칸센은 어느새 고쿠라역에 도착했다.
"이제 내려서 갈아타야 해요."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 캐리어까지 꺼내주며 덧붙였다.
"고쿠라에서 모지코 가는 일반 열차가 있어요. 바로 연결되진 않으니까 조금 기다릴 수도 있고요."
우리는 플랫폼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신칸센에서 재래선으로 이어지는 통로. 현지인과 관광객이 뒤섞인 복잡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한 줄기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조용히 물었다.
"그쪽, 여기도 처음은 아니죠?"
"글쎄요. 기억이 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 애매한 말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가 타야 할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한국보다 작고 소박한 차체. 관광보다는 일상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전보다 조금 가까운 거리. 창밖으로는 낮은 건물들과 산책길, 그리고 멀리 바다가 언뜻언뜻 보였다.
그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금은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곧 도착해요. 모지코는 바로 다음 역."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그와 함께 타고 있는 이 열차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흐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열차가 멈추는 소리. 창밖이 천천히 멈추며 시야가 또렷해졌다. 모지코역. 오래된 건물과 벽돌 지붕, 기차 유리 너머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빛.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짐을 들어주며 말했다.
"내려요. 이제, 진짜 도착했네요."
나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조용히 뒤따랐다. 모지코. 그의 목적지. 그리고 지금은, 나의 여행지.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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