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을

ep.08

by 추설

지난 화 마지막:

"곧 도착해요. 모지코는 바로 다음 역."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그와 함께 타고 있는 이 열차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흐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열차가 멈추는 소리. 창밖이 천천히 멈추며 시야가 또렷해졌다. 모지코역. 오래된 건물과 벽돌 지붕, 기차 유리 너머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빛.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짐을 들어주며 말했다.

"내려요. 이제, 진짜 도착했네요."

나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조용히 뒤따랐다. 모지코. 그의 목적지. 그리고 지금은, 나의 여행지.


ep.08 ( 2장. 피하고싶은 기억 )

모지코역.

주말이면 북적이는 곳이다. 몇 걸음마다 사람에 부딪히고, 사진 찍는 관광객들로 정신이 없다. 다만 오늘은 평일이라 그런지, 꽤 한산한 편이지만.

예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다. 그때도 이런 고요함을 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요해도 전혀 조용하지가 않다. 바로 옆에, 하루 종일 떠드는 이상한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이것저것 묻는다. 나랑은 확실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금요일이 되면 들뜨고, 누군가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여행엔 신이 나고 그런 피곤한 사람. 나는… 그 반대의 분류에 가까운 쪽이다.

흔히 떠올리는 일본의 풍경과는 조금 결이 다른 외관. 모지코역을 중심으로 누군가가 '모지코 레트로'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붙여두긴 했지만, 한국에서 말하는 그 '레트로'와는 조금 다르다. 건물들은 오래됐지만 단정했고,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는 그 풍경 하나만으로 이 장소가 꽤 괜찮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내내 시끄럽다가도 잠잠해지더니, 어느새 혼자서 이곳저곳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이 좀 우스워서 옆눈으로 살짝 훑어봤다.

잠시 후, 갑자기 조용해졌던 그녀가 내 쪽으로 휴대폰을 불쑥 내밀었다.

"저기요. 그쪽 그렇게 멍하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역 앞에서 사진 좀 찍어줘요."

"네…? 갑자기요?"

"휴, 무슨 갑자기예요. 해외까지 왔는데, 사진 한 장 부탁하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설마… 사진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그 말 하려는 건 아니죠?"

이 여자 말이 맞다. 다만 난 사람을 찍어본 적은… 거의 없다. 그냥 사물, 공간, 장면. 그런 것들만 찍었다. 이번 한 번을 제외하고는 앞으로도 그러고 싶지는 않다. 거절했다가는 또 얼마나 궁시렁 거릴지 모르니 일단은 찍어주자.

"…알았어요. 저기 서 봐요."

나는 휴대폰을 받아들고, 셔터음을 연속으로 울렸다.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별의별 표정, 포즈를 다 잡았다.

사진을 다 찍고,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살짝 놀려주기로 했다.

"모델이 납셨네요. 어울리지 않게 고상한 포즈는… 그래도, 여자긴 여자군요?"

그녀는 뾰로퉁한 표정으로 자신이 찍힌 사진을 넘겨보며 말했다.

"그럼 여자죠, 남자겠어요? 그리고 무슨 사진 작가라면서, 이렇게 못 찍어요?"

"미안해요. 농담 좀 했어요. 대충 찍은 건 정말 아니에요. 그냥, 모델이… 흠."

"참나, 어이가 없네요. 됐고, 그쪽 휴대폰 주고 그쪽도 저기 가서 서봐요."

갑작스러운 말에 순간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혔더라…?

"네…? 저도 찍어요…? 저는 뭐, 찍어도 올릴 데도 없고…"

"됐고, 빨리 가요. 같이 왔으면, 같이 즐겨야죠."

그녀는 내 휴대폰을 낚아채서는 나를 세워두고 몇 발짝 떨어졌다.

"저기요, 모델님. 지금 목각인형 같아요. 손으로 브이라도 해주신다든가. 남자들은 엄지 올리는 거랑, 손가락으로 브이 안 하면 죽는 병 있다던데 그쪽은 또, 예외인가 봐요?"

"혹시… 올리면 안 되는 걸까요?"

"그럼 그렇지. 그쪽 맘대로 해봐요."

나는 어정쩡한 자세와 함께 천천히 브이를 그렸다. 셔터음이 몇 번 울리고 나서 그녀는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저보다 더 잘 찍네요. 소질 있는데요?"

"그럼요. 제가 사람은 또 잘 찍어요. 목각인형도 진짜 모델로 바꿔 놓는다니까요?"

"아… 그 뒷말만 없었으면, 진짜 괜찮았을 텐데요."

사진 한 장으로 실랑이를 마무리 짓고 나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제 좀 걸을까요. 가만히 서 있다간 또 사진 찍자고 할까 봐 무섭네요."

그녀는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여기까지 와서 사진 안 찍으면 뭐 하려구요?"

모지코역을 등지고 몇 걸음 걷자, 붉은 벽돌 건물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이 묻은 창틀과 녹슨 난간, 햇살을 머금은 유리창 사이로 손질되지 않은 듯한 풍경이 조용히 이어졌다.

그 거리를 걷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문득 발끝에 밟히는 기분이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 한쪽이 잠깐 식어가는, 그런 종류의 익숙함이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꺼내 주변을 담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그 옆을 걸었다.

"오늘은 한산해서 좋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조용할 줄은 몰랐어요."

"사실은 그걸 노리고 평일로 잡은 거예요."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얼마쯤 지났을까. 조용한 골목 어귀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배를 감싸며 얼굴을 붉혔다.

"…들렸죠."

"네. 아주 또렷하게요."

"아, 진짜. 왜 꼭 이럴 때만 이래요."

"배고플만 하죠. 슬슬 뭐라도 먹어야 할 시간이었거든요."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여긴 처음이라 잘 몰라요. 맛집이든 뭐든, 그쪽이 책임지고 데려가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건물을 가리켰다.

"조금만 더 가면 괜찮은 곳이 있어요. 오래된 건물 꼭대기에 있는 조용한 식당인데, 전망이 좋아요. 아직 있다면요."

"그런 데 너무 좋아요. 지금 딱, 그런 데 가고 싶은 기분이에요."

나는 걷기 시작하며 툭 던졌다.

"근데, 식당 정하는 건 원래 그쪽 담당 아니었나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투 좀 고쳐요. 그리고… '그쪽' 말고, 혜은이라구요. 이.혜.은"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좀처럼 웃지 않는 내가, 이상하게 자꾸 웃게 된다.

"저기요, 그쪽 씨. 우리 진짜 식당 가는 거 맞아요? 바로 앞이라더니 꽤 걷는 것 같은데요."

"네? 뭐라구요? 그쪽 씨? 그쪽은 참을성이 없나 봐요. 이제 다 왔어요."

"네. 그쪽 씨 참을성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름도 안 알려줬잖아요. 그 전까진 계속 그쪽 씨라 부를 거예요. 그.쪽.씨"

나는 건물 꼭대기를 가리켰다.

"예예. 다 왔습니다. 바로 저기, 5층."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드디어! 오… 전망 좋겠다."

나는 그녀의 바보 같은 표정을 보고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예전에 한 번 들렸던 그 식당이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모르겠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잊고 싶었던 감정까지 함께 떠오르는 곳이었다.

"올라가죠."

우리는 좁고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와… 이런 엘리베이터 처음 봐요. 진짜 옛날 영화에 나올 법한 느낌이에요."

"말했잖아요. 오래된 건물이라고."

낡은 철제문이 열리자, 은은한 조명 아래로 식당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나무 바닥과 유리창 사이로 부드러운 향신료 냄새가 퍼져 나왔다. 카레 냄새였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안쪽을 둘러봤다.

"와… 너무 예쁜데요? 이런 데는 어떻게 찾았어요? 이 냄새, 카레죠?"

나는 안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네. 야끼카레 집이에요. 모지코는 야끼카레가 유명해서요. 미안해요, 메뉴는 제 맘대로 정했네요."

"아뇨, 괜찮아요. 카레 좋아해요, 저도!"

그녀는 아이처럼 신나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내 안에서 낯설게 번져갔다.

"우리 창가 쪽 앉아요. 제발요, 여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그러시지요."

그녀가 뛰듯 걸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는 항구 쪽이 내려다보였다. 오래된 선박과 붉은 벽돌 창고가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그 빛이 그녀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어디선가 익숙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이유도 없이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잠시 후, 뜨거운 철판 위로 김이 일었다. 치즈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가장자리에서는 바삭한 소리가 났다.

"우와… 진짜 맛있어 보여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꺼냈다.

"이건 자랑해야겠다. 잠깐만요! 아직 숟가락 들지마요!"


(찰칵) (찰칵)


"후.. 국적을 불문하고 여자는 역시 사진이네요."

"국적이요? 당연하죠 전세계 모든 여자가 그럴 걸요? 더군다나 그쪽이 고른 데잖아요. 이 정도면 인증할 만하지 않아요?"

그녀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이제 진짜 먹죠.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정말 뜨꺼워요"

치즈가 길게 늘어났다. 그녀는 입술을 데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작은 소리에 잠시 눈길이 갔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뒀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내려놓았다. 묘하게 익숙한 냄새였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쪽은 여기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한두 번 와본 것 같지가 않아서요. 단순 여행은 아니었겠죠. "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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