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앞에는 수년 전부터 이런 문구를 붙여놓고 볼 때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오늘 하루 24시간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조물주가 자기에게 허락한 유한한 시간을 소비하고 간다.
80세 인생은 700,800 시간, 100세 인생은 876,000 시간을 사는 것이다. 때로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 시간을 미처 다 쓰지도 못하고 가기도 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부모에 의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살아있으니 그냥 열심히 삶에 충실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도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인생을 철학적으로 음미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늙어간다는 증거다.
‘선물’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로부터 받게 된 것을 말한다. 즉 나 스스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감사한 것이다. 또 대부분의 선물이란 반대급부 없이, 조건 없이 주어지는 공짜의 성격이 짙다. 주는 이가 받는 이에 대한 호의를 가지게 될 때 주는 것이 선물이다. 그러므로 받으면 기쁘고 그 기쁜 표현을 하게 된다.
이 ‘시간이라는 선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흔해 빠진 것에 대한 고마움을 모를 때가 많다. 어린 시절에는 앞날이 창창했었으니까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이 그렇게 경이롭지 않았고 어서 어른이 되지 못해 안달이었다. 젊은 시절의 시간은 전혀 그것이 선물인지도 몰랐고 더디 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아니 시간이 점점 없어지는 것인 줄도 몰랐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 매일 한 장씩 날짜를 뜯는 일력이라는 캘린더가 있었다. 연 초에는 일력이 두툼했지만 한 장씩 뜯다보면 어느 새 몇 장 남지 않은 일력을 보았을 것이다. 인생의 시간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제 인생의 고갯마루를 넘어서니 남은 시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 것이다.
무한대일 것 같았던 내 시간들이 아! 얼마 되지 않을 유한한 것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이 소중한 시간들이 선물과도 같은 것임을 알고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한문 교과목을 배우게 되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경구가 있으니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니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구절이다. 중국 송나라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의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는 뜻인데 어린 나이에도 그 시가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지나온 내 인생을 돌아보면 다른 인생들과 비교해서 그다지 세월을 헛되이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주색잡기에 빠져 세월을 탕진하지도 않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해본 적도 없었다. 물론 인생마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건 자유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정답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 선물과도 같은 시간을 혹시 낭비하지 않았나하는 후회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내가 중학생 시절에 보았던 영화 “빠삐용”은 정말 전체 줄거리도 명작이지만 그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가 압권이다. “네 죄명을 알겠나?” “전 결백합니다. 죽이지 않았어요.”
“그건 사실이다. 넌 살인과는 관계없어” “그럼, 무슨 죄로?”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한 죄다. 널 기소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주인공 스티브 맥퀸은 독방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이 말을 듣고는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 이것은 시간을 선물로 주신 조물주에 대한 대단한 실례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로부터 생일선물로 케잌을 받게 되면 그 케잌에 촛불을 꽂아서 후욱 불고나서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거워한다.
우리 인생에 ‘시간’이라는 이 선물도 나 혼자 가지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그 시간이 내 것이긴 해도 오로지 나를 위해서 다 쓰고 갈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누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인가 생각게 된다. 그래서 시간은 선물인 것이다. 그런 인생에게 선물을 주신 분도 보람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내게 있어 선물과도 같은 이 시간들에 대한 키워드는 ‘가치’이다.
이제라도 이 선물을 좀 더 가치 있게 사용해보고 싶다. 앞으로 얼마나 될 런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