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성호 Cha sungho Jul 22. 2023

검찰청에서 온 편지

                   

 

  1988년 5우편실 아침은 완전 도떼기시장이다방금 도착한 우편물 행낭 자루가 가득히 쌓이고 하나씩 풀어헤친 후 집배 구역별로 대분류를 하기 바쁘다여기저기서 던지는 우편물 뭉치가 우편 실 하늘을 휙휙 날아다닌다.  

이 날도 아침 7시에 출근하여 커피 한 잔 마실 겨를도 없이 우편물 분류하느라 바삐 손을 움직인다동료들로부터 넘겨받은 우편물을 다시 나의 집배 구역 순서대로 소분류를 해야 한다.

이제 3년 차가 되니 마을별로 집 순서들이 머릿속에 편안하게 저장되어 있다우리 집배원들은 이 작업을 ‘구분한다’라고 표현한다구분을 재빠르게 해치우고 등기 우편물을 별도로 수령해서 사이사이 순서대로 끼워 넣는다거기에 부담스러운 소포들까지 오토바이에 싣고 나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면 그래도 빠른 출발이다그래야 점심때 동네 구멍가게에서 라면이라도 한 끼 때울 수 있는 타이밍이 된다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편물 구분하느라 정신없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어이 차성호니 편지다!”라며 던져준다무심코 받아 든 편지를 살펴보던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신인이 마산지방 검찰청 박기숙이다일단 검찰청이란 단어에 멈칫했지만 그 뒤 박 기숙이란 이름에 가슴이 콩닥거렸다그 이름은 지난 주말에 친구 소개로 만난 그 아가씨 이름이 아닌가그렇지그 사람이 마산검찰청에 근무한다고 했지깜짝 놀랐네근데 웬 편지를?

하지만그 시간엔 너무 바빠서 편지를 뜯어 읽어볼 틈이 없었다편지를 윗주머니에 잘 접어 넣고 일단 밖에 나가서 읽어 보기로 했다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무슨 내용일까.

 

지난 토요일 저녁마산에서 제일 번화하다는 창동 골목 나드리에라는 경양식집에서 서로 만나기로 하였다첫 만남이라만남을 주선한 고교절친 홍찬이가 동석하였다홍찬이와 박기숙 씨는 같은 검찰청 동료였다친구랑 나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가서 기다렸다시간이 되어 나타난 아가씨는 걸음걸이부터 박력 있게 걸어왔다서로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면서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일이 되려는 징조였다여자 앞에서 숙맥인 나도 그날 나답지 않게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중간에서 친구 홍찬이는 슬며시 먼저 간다고 빠져 주었다

커피숖에서 헤어지지 않고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바래다준 박기숙 씨는 다음 주 토요일 경남대학교 완월강당에서 열리는 성악가 안민 음악회에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마침 티켓 두 장이 있다고 했다나야 고맙기 그지없었다. 1초도 안 망설이고 승낙했다생각해 보니 애프터 신청을 받은 거지여자한테 먼저뭔가 순서가 바뀐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근데오늘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편지까지 받고 보니 살짝 긴장되었다우체국에 근무하는 장점이 바로 이런 거지편지를 가장 빨리 내 손에 받아볼 수 있다는 것오전에 눈썹이 날리도록 우편배달을 하고 마을 중간에 있는 양지바른 묏등 잔디밭에 앉아 땀을 식히며 박기숙 씨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어라편지지가 아니라 원고지였다하지만 원고지 칸을 지켜가며 쓴 글이 아니라그냥 써 내려간 글이었다엊그제 만났던 일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나의 대한 인상 등을 막힘없이 적어놓았다한마디로 나와 계속 만나 볼 의향이 있다는 ok사인이었다정말 고마운 일 아닌가나 같은 사람을 계속 만나보겠다니

그런데 아차 싶었다지난 첫 만남에서도 애프터 신청을 그쪽에게 빼앗기더니 이번 편지도 그쪽에서 결과적으로 선수를 먼저 친 것이 아닌가주소를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내 근무지가 김해우체국이란 말만 듣고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난 속으로 상대방이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어쩜 아가씨가 나보다 더 적극적이란 말인가

 

이렇게 해서 우린 서로 휴대폰도 없던 시절, 11개월 동안 낭만적인 연애편지로 사랑을 키워갔고 지금은 같은 집에 산 지 34년이 되었다지금도 보관 중인 연애편지를 꺼내보니 편지봉투에 적힌 숫자가 63까지 적혀 있다거의 매주 2통씩은 주고받은 셈이다그 바람에 필력이 많이 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한 여자를 얻기 위해 한 남자는 그렇게 긴긴밤을 새웠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무공훈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