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아인슈타인을 통해 현재를 대하는 태도를 배우다.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 거리로 니체가 산책을 나선다. 이때 길에서 진창에 빠진 말을 발견한다. 진창에서 꼼짝 못 하는 말을 마부가 채찍질을 하자, 말은 그런 채찍질을 맞으며 일어나려 하지만 깊은 진창에서 더욱 깊게 빠지며 허우적거리기만 한다. 그럴수록 마부의 채찍질은 더욱 강해졌다.
그때 니체가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어 말의 목을 붙잡고 흐느끼며 목 놓아 울었다.
사람들이 그런 니체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꼬박 이틀 동안 정신을 잃었고, 결국 정신병원에서 10년 동안 살다가 1900년대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라고 가르쳤다. 그런 니체가 왜 채찍질을 맞고 있던 말을 껴안고 흐느꼈을지 의문이 든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
신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에게 갈 세계는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난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이게 나의 운명이겠거니’하며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니체의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는 의미는
뒤집어서 생각해야 이해가 된다.
니체의 말은 ‘자신의 삶을 사랑스럽게 만들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더욱 훌륭하고 행복하기를 비라는 마음처럼,
우리가 어떤 정원을 사랑하면 더욱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도록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용기와 믿음,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이다.
니체는 또한 ‘영원회귀’ 사상을 중요시 여긴다.
영원회귀 사상을 간단히 말해서 ‘동일한 것이 영원히 돌아온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니체의 언어는 은유와 비유로 가득 차 있어서 한 가지 의미로만 단정 지을 수 없어서 여러 해석들이 존재하는데,
영원회귀의 첫 번째 해석은
‘똑같은 현재가 영원히 반복된다.’이다.
예컨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1만 년 전에도 일어났고, 2만 년 전에도 일어났으며 2만 년 후에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카세트테이프가 반복해서 돌아가는 것처럼 똑같은 현재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두 번째 해석은
‘똑같은 현재를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니체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라고 했다. 그런데 똑같은 현재를 영원히 산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똑같은 현재가 반복된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도록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해석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후회하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하며 때로는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혹은 미래를 그리며 희망을 품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미래를 기다리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의 과거와 미래는 우리의 관념 속에만 존재한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경험하는 것은 ‘현재’이기에
우리는 영원히 현재만을 산다.
영원한 현재, 영원한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모두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가 영원히 반복되므로 현재를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현재는 영원히 반복될까?
놀랍게도 니체의 일화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을 들여다보면 현재는 영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지구에 있는 나의 시간보다 우주에 있는 사람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걸 보면 지구 보다 중력이 강한 지역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걸 알 수 있다.
시간은 운동과 중력에 따라 각각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쿠퍼가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오니 딸이 할머니가 되어 있던 것이다.
쿠퍼의 시간보다 딸의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념으로는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힘들다.
쿠퍼의 시선에서 딸은 미래에 존재하고, 딸의 시선에서 보면 쿠퍼는 과거에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나의 현재는 나의 미래이고, 나의 미래는 나의 과거인 것이며 그의 과거는 그녀의 현재이고, 그녀의 현재는 나의 과거이다.
그러고 보면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으로 따지면 그렇지 않고 과거와 미래는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우주에서 어떤 블랙홀 로 들어가서 과거의 딸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미래에 가도 과거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원주의’ , ‘Enternalism’ 이라고 하는 것이며 영원주의로 생각하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도 지금 현재, 이 순간 글을 쓰고 있지만,
나의 이 현재의 글이 누군가는 미래에서 내 글을 볼 수 있고 혹은 현재가 지나 과거에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현재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니체는 왜 진창에 빠진 말의 목을 붙자고 울었던 것일까?
니체가 왜 그랬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단지, 추측해 보면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했지만,
진창에 빠진 말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지 눈으로 목격하고 자신도 진창에 빠진 말과 같은 운명인 것을 깨달으면서 니체는 절망에 빠진 것 같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비단, 진창에 빠진 말의 운명만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헝가리 영화인 <토리노의 말>의 영화는 말을 채찍질하던 마부와 그의 딸의 삶을 그린 영화다.
마부와 딸은 말을 부리고, 옷도 갈아입고, 감자와 소금을 뿌려 먹으며 반복되는 삶이 전부이다.
그리고 황량한 벌판과 모래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마부와 딸은 그런 상황에 집을 떠나려 하지만,
갈 곳이 없고 지금의 삶보다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다시 집을 돌아온다.
이런 마부의 삶은 현대인들과 매우 닮아있다.
그저 안주하는 삶, 반복적인 일상
현실세계에서
그저 편안한 삶을 바라는 사회의 시스템과 교육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시스템과 교육에 맞춰 갈 수밖에 없다.
사회가 정해 놓은 길을 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고 우리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가 남기고 간 ‘아모르파티’를 위해서는
사회가 정해놓은 삶이 아닌 자신을 진정으로 찾아야 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자신의 현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과거에 나를 용서하고 반성하며 자신을 인정하며 현재를 나아가고 이 현재는 곧 미래기에 지금의 선택이 나의 현재의 미래기에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분명한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재가 곧 과거이며 미래다.
자신을 잃은 니체는 결국 죽었다.
죽지 않았어도 그가 자신을 잃은 후 그의 삶은 죽음과 같았을 것이다.
나 또한 나를 잃었기에
삶을 다시 살아도 삶이 죽음과 같았기에.
가장 중요한
자신을 사랑해라.
거기서부터 현재는 바뀌어 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