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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철학을 통해 삶을 배우다.

#우리가 늘 불안한 이유,

by EHOM

우리는 왜 불안을 느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앞서 ‘실존주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실존은 있는 것을 말하며 본질은 그것을 이루는 의미나 이유를 말한다.


먼저 내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을 들여다보자.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전부 완제품이다. 자동차, 연필, 등 그러한 모든 사물들은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다. 자동차의 경우 이동수단이 필요해서, 연필의 경우 쓸게 필요해서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본질이 정해진 것들을 완제품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그런 완제품들 사이로 미완된 존재가 존재한다.

즉, 완성되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인간’이다.


따라서 완제품들은 언제나 본질을 가지지만 미완인 우리의 존재는 그 어떠한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완제품의 경우 고장이 나거나, 완제품의 정해진 본질을 다 하지 못할 때 그것은 존재 가치가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미완의 존재로서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렇다면 만약 인간을 이미 완성된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그 인간은 이미 완성된 존재의 성격이나 본질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즉 규정된 존재로 묶인 채, 또는 그런 본질을 외부로부터 규정되어 버리면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자유와 선택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완된 존재이기에 선택하고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구체적 방향과 자신의 성격을 만들어가고 그렇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모여 자유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처럼 오히려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적 존재임으로 어떠한 규정이나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학생 신분일 때 성적으로나 다양한 것들로 평가를 받게 된다. 학생의 신분일 때는 좋은 성적과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하나의 틀에 얽매여 그것에 관해 평가를 받게 되며 학생이라는 폐쇄적 존재로서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서 사회에 나오게 된다고 하여도 그 자체로 존재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우리는 ‘직장’이나 특정한 환경 속에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정에 우리는 갇힌 채 끊임없이 평가를 받으며 우리는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잃고 사회에 맞춰 폐쇄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늘 평가받으며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정리하면, 인간은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특정한 상황 속에서 부여받은 역할을 인간의 본질로 착각하여 그 안에서 자기의 역할의 대한 평가를 자신의 본질로 착각해 사회가 만들어 놓은 본질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가 정해놓은 프레임 안에서

인간은 미완의 존재인 것을 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을 설명할 때 직업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그것이 곧 자신인 마냥 권위를 바라는 것,

또한 그 직업에 대한 편견으로 자신 마저 그 직업에 평가로 인해 자신을 숨기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시험이나 평가를 통해 성적으로 칭찬하기도 하며

성적으로 혼나기도 하며 자신의 본질을 성적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잃은 채 살아가는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확고한 존재이유를 가지지 못했기에 늘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근본적인 기분상태와 관련하여 ‘불안’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했으며


사르트르 역시도 인간은 결국 우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논문을 펼친 것이다.


실존주의의 철학은 ‘실존적 근본경험‘을 탐구주제로 삼고 있으며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기분’을 연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인간의 기분은 대상화하기도 힘들뿐더러 인간이 느끼는 불안, 초조, 기쁨 등을 수치화할 수 없고, 그것은 주관적이며 직접적이기에 자신의 기분을 간접적인 언어와 행동을 통해 표현하기에 기분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실존주의 철학은 경험과 인간이 가지는 기분을 무시하지 않은 채 예술적인 형상을 빌려 표현하려고자 한 것이다.


사르트르가 유명한 극작가였다는 점과 실존주의의 문학 거장인 카뮈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기분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자기 존제로 의식하며 산다, 이러한 관심은 인간존재에 고유한 특징이로서 실존은 시간에 지평 위에서 자기에게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늘 불안해하고, 그 불안을 해소하려자 끊임없이 발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존재하고 있지만 완제품의 형태로 있는 게 아니고 언제나 무엇으로 되어가고 있으며

그것이 자기 자신의 직접 관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곧 현실의 사회는 여전히 평가의 지평선에 놓여 있으며 우리의 본질은 그것들로 규정되어 버리고 각자 개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다수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엇으로 지정되어 버린 우리들은 그러한 현실에 이미 익숙해졌으며 평가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이미 정해져 있는 평가의 틀을 깨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며 사회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맞춰 그것이 다 인 것처럼 폐쇄적인 현실에 구속될 것이 아니라, 그저 나로서, 나라는 존재 자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부터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이나 나를 만족하기 위해서 폐쇄된 현실이 아니라 언제나 시간적으로 개방된 실존의 가능성이 있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임을 인지하며


진정한 부자로 거듭나길, 진정한 실존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미완의 존재이기에 늘 불안하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에 얽매인 것이 아닌
자신의 본질을 찾아갈 때,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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