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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멘탈 Jul 27. 2023

어서 와 고난의 길에.

준비됐어? 고생할 준비?

열 시간의 비행은 길었다. 눈물을 쏟아내다가 밥을 먹고 잠깐 졸고 영화를 보고 또 눈물을 쏟아내고 밥을 먹고… 나의 당장의 현실은 영어와 맞서야 하는 것이었다. 덜덜 떨며 여권을 내어주고 묻는 말에 덜덜 떨며 간신히 대답을 하고는 입국 심사를 마쳤다. 그렇게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처음 몇 주는 엄마가 없다는 현실보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외국에 왔다는 설렘이 더 컸다. 모든 게 새로웠기 때문에 실감이 잘 나지 않았고 그냥 여행을 온 것 같았다.


단, 좋은 시간은 첫 몇 주였다. 눈물겨운 고생길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고난은 영어였다. 나는 1년을 꿇고 하이스쿨 9학년 (한국 학년으로는 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하기로 하고 랭귀지스쿨에 다니게 되었다. 엄마는 그중에서도 학비가 가장 높았던 UTS(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시드니 공과 대학교) 부속 랭귀지 스쿨인 Insearch에 나를 등록했다. 레벨 테스트 후 나는 여덟 개의 레벨 중 여섯 번째 높은 반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얼떨떨하고 꿈을 꾸는 것 같고 여기저기서 엄마가 보고 싶었고 영어가 짧아 매우 답답했지만 그렇게 진짜 호주 생활이 시작됐다.


나는 항상 칭찬에 목말랐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애석하게도 엄마, 아빠는 칭찬에 인색했다. 내가 학교에서 상을 받고 반장이 되어도 시원하게 칭찬을 듣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고는 했다. 잘했다는 표현을 말로는 하지 않고 대부분 책을 사줬다. 칭찬에 대한 목마름은 집착이 되어 나이가 들어 갈수록 나를 힘들게 했다. 매일매일을 나 자신이 아닌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지 용을 쓰며 살았다. 이를 악물고 매월 있던 랭귀지 스쿨 레벨테스트에 집착했다. 사실 엄마한테 칭찬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떻던 그 덕에 난 우수한 성적으로 가장 높은 반까지 빨리 올라가서 예상 보다 더 일찍 랭귀지 스쿨을 끝낼 수 있었다.


같이 살게 된 '삼촌'네 식구가 교회를 다녔는데 아빠는 내가 친구를 사귀고 영어를 한마디라도 더 하려면 교회를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게 되었다. 시드니에서도 규모가 큰 한국장로교회였다. 내가 갔던 중등부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영어였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애를 써도 알아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주일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영어 듣기에 집중했다. 나는 맨 끝자리에 앉아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는 했는데 그중 뭔가 특이하거나 몰랐던 영어 단어를 하나 골라 한주 내내 발음을 연습했다. 그러고선 교회에 가서 그 단어를 넣어 한 마디 하고서는 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그래서 교회 친구들은 아무도 내가 유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의 방식대로 영어와 맞서고 있었다.


처음 3개월은 내가 살기 바빠서 그 당시에 아빠가 어땠는지 엄마가 어땠는지 챙길 정신이 없었다. 그때는 해외에 전화를 하려면 선불 전화카드를 사서 공중전화에서 해야 했는데 전화비가 너무 비싸서 엄마랑 전화 통화도 자주 못했다. 나도 나지만, 아빠도 엄마도, 너무나도 바뀌어버린 일상 속에서 부단히 각자의 고난의 길을 걷고 있었을 거다. 개인적으로 호주에 오고 첫 3개월이 정말 큰 고비였다. 말할 수 없이 큰 불안감과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매일 나를 덮쳤다. 사실 무서웠다. 망망대해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적응을 하고 레벨 테스트도 곧잘 하고 있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햄버거 세트 주문 하나 하기도 벅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북한에서 왔냐 남한에서 왔냐 묻고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밥 먹듯이 인종차별을 당하고 내가 인종차별을 당한 건지도 잘 몰랐다. 알았다 한들 화가 나도 시원하게 영어로 따지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나 자신의 대한 의심, 내가 정말 해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가장 민감한 시기에 아빠랑 같은 방을 쓰게 된 것도 도움이 될 턱이 없었다. 아빠가 잠든 것 같으면 새벽녘에 혼자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소리 안 나게 울고는 했다. 그때는 아빠가 잠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좁아터진 방에 아빠가 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그랬다면 아빠가 많이 속상하고 안타까웠을 텐데 지금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리다.


호주 온 지 3개월 만에 40 키로 정도 나가던 나는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었다. 살은 찌는데 머리는 또 군데군데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가져온 옷들이 안 맞기 시작했고 난 점점 거울을 보기 싫어졌다. 안 그래도 추락한 내 자신감은 땅을 뚫고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엄마, 아빠는 그때의 내 흑역사를 내가 호주 와서 영어 때문에 그리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받은 스트레스, 혹은 사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첫 하숙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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