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전,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인 종묘의 가을을 담아왔다.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니 하늘과 나무와 단풍과 종묘 건축물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운 날이었다. 해설사님을 따라다녀야 하는 시간제 관람이라 자유롭게 보지 못해 아쉬웠으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오래 보자는 취지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아이들이,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종묘를 계속 보게 하기 위해, 이 땅에 문화유산이 보존되기 위해서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롭게 둘러보고 싶으신 분들은 주말과 공휴일에 방문하시길 권한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廟]을 지어 혼을 섬긴다.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곧 왕이 왕일 수 있는 근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종묘는 국가 최고의 사당인 것이다.
종묘는 유교 사당의 모범으로서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고,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를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정문인 외대문
*시간제 관람에 따라 해설사님이 안내한 코스의 장소만 기록하였다.
1. 신로(神路)
신로 세부모습
종묘제례 등의 의식을 위해 만든 길로, 3개의 길이라 삼도(三途)라고도 한다. 약간 높은 가운데 길은 신주와 향·축이 들어가는 신로, 동측의 길은 왕이 걷는 어로, 서측의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신로에는 거칠고 널찍한 박석들이 외대문 안에서 남신문 밖까지 깔려 있다.해설사님의 안내 하에 왕의 길로 걸어보았다. 왕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절도 있게 걸을 줄 알았는데 웬걸, 박석들이 울퉁불퉁해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살살 걸을 수밖에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떼면서 생각했다. 이는 만든 사람의 의도가 아닐까? 걸음걸이를 살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한 마음으로 조선의 왕들을 만나라는. 왕조차도 역대 왕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닐는지.
2. 재궁(齋宮)
재궁 내부
왕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 또는 어숙실(御肅室)이라고 불린다. 가운데 있는 건물에 왕이 머물렀고 동쪽 건물에 세자가 머물렀고 서쪽 건물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좌) 재궁의 단청 (우) 밖에서 바라본 재궁
종묘의 건물들은 색만 보아도 엄숙함이 느껴지도록 왕실과 관련된 다른 건물들처럼 화려한 단청을 하지 않았다. 붉은색과 녹색으로만 칠한 건물들이 엄숙하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3. 전사청(典祀廳)
종묘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4. 정전(庭前)
정전 전경
역대 왕 중에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건물로, 현재 19분의 왕(왕비까지 49위)을 모셨다. 태조 4년(1395)에 7칸으로 처음 지어졌고, 명종 원년(1546)에 4칸을 오른쪽으로 덧붙였다가 임진왜란으로 종묘가 불타자 광해군이 11칸으로 다시 지었다(1608년). 영조 2년(1726)에는 다시 4칸을 덧붙여 15칸이, 헌종 2년(1836)에 지금과 같은 19칸이 되었다.
동서 길이가 101m로 동양의 목조건물 중 가장 길다. 그래서일까? 정전은 보는 순간 압도적, 근엄, 장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현재 정전은 수리보수 중이다. 내년 상반기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정전 전체 모습
5. 영녕전(永寧殿)
영녕전 전경
세종 3년(1421)에 지은 정전의 별묘(別廟)이다. ‘영녕’은 ‘왕실 조상과 자손이 함께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즉위 년(1608)에 다시 지은 후, 두 차례에 걸쳐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 15위와 왕비 17위,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좌) 영녕전 월대 (우) 영녕전 월랑
지금의 종묘는 헌종 2년(1836)에 마지막으로 증축한 모습으로 정전은 19칸, 영녕전은 16칸이다. 흥미로운 것은 헌종 대의 증축이 마치 왕조의 마지막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정전의 마지막 신실인 제19실에는 순종을 모셨고, 영녕전의 마지막 칸에는 영친왕을 모시면서 16개 신실이 다 찼다. 그러고는 더 모실 신위도 빈 신실도 없었으니 조선의 역사는 막을 내린 것인지… 일제에 의한 조선 왕조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비통하고 서글펐다.
*신실(神室)-신위을 모신 방
신위(神位)-신주를 모셔두는 자리
정전 남신문 앞에서 해설사님의 설명을 듣는 외국인들
자기네 말로 번역된 종묘의 설명을 듣는 외국인들을 보니 파란 눈동자 속에 비친 종묘는 어떨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종묘의 건축물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우리처럼 감탄할까? 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데 감흥이 있을까?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1997년 종묘를 다녀갔다. 정전을 보면서 그는 “민주적”이라고 했다. 똑같이 생긴 정교한 공간이 나란히 이어지는 모습에서 권위적이지 않고 무한한 우주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조선을 상징하던 종묘는 과거처럼 사람들에게 조선과 왕실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시켜주는 숭배의 장소는 아니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유산 방문 코스 방문자 여권의 열 개의 길, 일흔여섯 개의 국가유산 중에서 '왕가의 길' 종묘에 그 첫발을 내디뎠다. 가을이 가득한 종묘를 거닐며 전자책 출간의 기쁨을 누렸다. 자연스레 앞으로의 쓸 날들에 대해 생각해 봤고, 어렴풋이 쓰기의 꿈이 생겼다. 답사를 통해 한국의 특별한 아름다움과 깊이 있는 역사의 가치를 써 내려가고 싶은 꿈, 나만의 시선과 문체로 나의 글에 역사를 담고 싶은 꿈, 내 손안에 스마트폰이 있는데 왜 역사를 배워야 하냐고 묻는 11살 아들과 한국사를 공부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꿈. 방문자 여권에 스탬프를 채워나가는 것도 희미한 꿈이 선명한 목표가 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