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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호 May 15. 2024

<아부지 로또 당첨되다!>

아부지: 이거 한 번 확인해 봐라.  

   

아부지는 아이처럼 웃으면서 작은 종이를 툭 무심하게 내밀었다. 로또였다. 아빠의 저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분명 본 적이 있는 표정이었다. 밝게 웃으면서도 어딘가 수줍은 표정. 뿌듯함과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의 중간쯤이라고 할까. 어린 시절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 아빠는 저런 표정을 지었겠구나 싶었다. 아 맞다. 아부지는 회사에서 받은 200만 원짜리 노트북을 나에게 줄 때도 저 표정을 지었었다. 그때 당시 나는 25만 원 중고 노트북을 매일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작업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하늘에서 200만 원짜리 신형 노트북이 떨어진 것이다. 정말 꿈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새 노트북이 생기니 이상하게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것이다. 25만 원 노트북에 정이 든 것도 있지만 새 노트북을 최대한 아껴서 쓰고 싶었다. 나는 기어이 중고 노트북이 거의 폭발하기 직전까지 사용했다. 아빠는 내가 새 노트북을 언제쯤 쓸까 궁금한 마음에 매번 내 방문 근처에서 더 천천히 걸었다. 내가 새 노트북을 사용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그거 좋냐' '괜찮냐'를 연신 물었고, 그때마다 '응! 너무 좋아'라는 내 대답에 딱 지금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아빠의 저런 표정은 지금까지 딱 두 번 봤다. 그 정도로 보기 힘든 귀한 표정인 것이다.

      

아부지: 로또 3등이야. 수동.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아빠의 말투에서 로또 고수의 느낌이 묻어났다. 동생은 듣자마자 펄쩍 뛰면서 '종이 잘 보관해! 혹시 물이라도 튀거나 찢어지거나 꾸겨지면 어떡해!' 소리쳤다. 엄마는 방에서 뛰어나오면서 동시에 '정말이야? 그럼 얼만데?'라고 물었고, 동생은 빨리 모두 박수치라고 재촉했다. 우리는 아빠를 둘러싸고 신나게 박수를 쳤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모두 모여 뭔가를 축하한 건 아부지 환갑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수동인 건 진짜 대단한 거야! 보통 일이 아냐!!'라고 흥분해서 말했다. 로또 당첨이 우리 가족을 이렇게 뭉치게 하다니,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멈추지 않더라도 당첨의 여운이 제발 길게 이어지길 바랐다.     


아부지: 5천 원 치를 사면 5번 할 수 있거든. 첫 번째는 사랑이를 위해서 두 번째는 날 위해서, 세 번째는 은혜, 그리고 당신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했는데 두 번째에서 3등이 된 거야. 

나: 와 그럼 당첨금을 아빠를 위해서 다 쓰라는 하늘의 계시 같은데? 다시 박수!!     


기뻐하는 가족들 사이로 아빠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서운한 눈빛으로 

아부지: 번호 하나만 더 맞췄어도 1등이야. 14억. 보너스 번호 맞췄으면 2등이고..

 

뭐? 14억?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모여서 박수치며 기뻐했던 우리는 마치 누구한테 14억을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씁쓸해졌다. 아빠는 그날 샤워를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하나만 더 맞췄으면’ ‘21번 찍었으면.. 아오’ 같은 혼잣말을 했고 동생과 나는 1등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토론을 몇 시간이고 벌였다. 나는 쇼파에 앉아서 아빠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나: 1등 되면 뭘 하고 싶은데요 아빠

아부지: 음.. 나 혼자 시골 가서 살아야지. 너랑 사랑이 차 한 대씩 사주고      


‘난 차도 필요 없고 심지어 면허도 없는데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빠를 꽈악 끌어안았다. 아빠는 다음 날 농협에 가서 당첨금을 받아왔다. 그대로 다시 통장에 넣었다고 했다. 나는 아빠가 제발 그 돈을 가족들 말고 자기를 위해서 다 썼으면 좋겠다. 맛난 걸 먹어도 좋고 갖고 싶은 물건이나 옷을 사도 좋고 여행도 좋고 정말 쓸데없는 곳에라도 좀 썼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아는 아부지는 그 돈을 절대 쓰지 않을 것 같아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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