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호 Jan 22. 2024

<자갈치로 사또밥을 퍼먹으라니까>


동생: 너 때문에 이상한 것만 배워가지고 알기 싫었는데 다 너 때문에 알게 되잖아!  

   

동생 말이 맞다. 동생의 취향 7할은 내가 만든 것이다. 노는 방법, 말투, 웃음 코드, 즐겨보는 영화, 입맛까지 전부다 나의 영향을 받았다. 아니 의도적으로 영향을 주려고 지난 시간 무던히도 노력했다.   

      

나: 아니 그렇게 먹지 말고 자갈치로 사또밥을 퍼먹으라니까? 숟가락처럼 아니, 마지막에 자갈치를 먹어야지 같이 먹는 게 아니라.      


동생이 처음으로 내 방식을 거부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동생은 6살이었을 때 즈음이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갈치로 다른 과자를 퍼먹는 게 제법 멋지고 재밌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동생은 처음으로 너나 그렇게 먹으라며 화를 냈다. 우리는 그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그렇게 먹어야 좋은지, 따로 먹는 게 왜 나쁜지에 대해서 며칠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동생은 끝까지 자갈치를 과자용 수저로 사용하지 않았고, 그 이후부터는 보란 듯이 내 방식과 반대로 행동하곤 했다. 내가 야채 과자를 케첩에 찍어 먹으면 동생은 일부러 마요네즈를 가져와서 내 앞에서 먹었고, 내가 밥에 간장이 비벼 먹으면 동생은 간장은 쏙 빼고 밥에 참기름만 비벼서 먹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동생의 취향 7할은 내가 만들었다. 그 교집합으로 우리는 7만큼 이어져 있다.     


자갈치와 달리 동생에게 절대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나눠버린 것도 있다. 바로 나의 우울. 내 우울은 동생을 삼켰다. 동생의 우울은 내 탓이 맞다. 나는 반드시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동생을 다시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3년 전 겨울 동생은 많이 울었다. 더 이상 몸에서 나올 수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일 울었다. 눈 주변이 벌게져서는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면 나는 새벽이든, 낮이든 언제든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동생은 그때마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했고 나도 지겨울 정도로 같은 말로 동생을 위로했다. 그러기를 몇 달 동생은 한계에 다다랐다. 동생은 몸속에 갇힌 영혼이 매 순간 괴로워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고 언제라도 그 몸을 벗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무서웠다. 나에게는 동생을 달래고 정신을 빼놓을 49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었지만 전부 통하지 않았다. 동생의 그런 모습은 바로 나에게서 온 것이다.       


나는 결국에는 행복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동생 옆에서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틀어두고 기분이 좋아질 만한 책을 찾아서 소리 내서 읽기도 했다. 찾다 찾다 없으면 나는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 우울했지만 결국 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최대한 진짜처럼 만들어냈다.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영화 리스트를 만들어서 매일 같이 새벽에 한편씩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부 통하지 않았다.     

  

나: 해외로 가자. 유럽으로, 거기 가서 새롭게 시작하자. 거기서 몇 달 지내면서 영어 공부도 하고 영어 이름도 새로 만들어서 거기서 아예 다시 시작하자. 마음에 들면 아예 거기서 눌러앉는 거야.    

 

동생이 살기 싫다며 우는 날이면 나는 여행사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유럽의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짐 싸기 꿀팁 영상을, 꼭 가봐야 하는 식당 리스트를, 해외여행에 꼭 필요한 영어 표현 100가지를 공유했다. 축 처져있는 동생을 일으켜서 영어 이름을 만들게하고 여행 가서 입을 옷을 사게 했다. 그럼에도 그 많은 방법이 소용 없던 날들도 더러 있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동생에게 반드시 널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내 약속은 더 이상 닿지 않았다.      


나: 그래도 유럽은 가보고 죽어야지. 죽는 건 갔다 와서 생각해도 안 늦어! 비행기에서 라라랜드 보기로 했잖아. 인스타에 올리고 싶다며, 그게 버킷리스트였는데 안 해보고 죽으면 억울하잖아. 나 같은 것도 이렇게 살잖아!!!!     


해외여행이라고는 일본을 며칠 가본 게 전부인 우리는 처음으로 유럽의 작은 섬 몰타라는 나라로 떠났다. 나는 알바로 조금씩 벌어놓은 돈을 털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의 티켓을 끊었다. 나는 동생에게 걱정말라고 다 아니까 나만 믿으라고 돈도 많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은 돈이 아까워서 캐리어 대신 군용 가방을 들쳐업고 보자기같은 가방을 바리바리 싸갔다.  경유 방법과 입국 심사에 쓰일 영어를 빼곡히 쓴 종이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렇게간 몰타는 부모님께 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함께 간 여행에서 우리는 셀 수도 없이 많이 싸웠다. 같은 버스에서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로를 노려보며 다닌 날도 있었다. 그래도 동생은 지금까지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짜증도 내면서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그것으로 내 버킷리스트는 이뤘다.     


동생이 살다가 괴로워서 또 온몸으로 울면 나는 다시 51번째 방법을 찾을 거다. 그 방법이 안 먹히면 나는 또 52번째, 53번째를 계속 찾고 또 찾을 거다. 동생이 웃으면 내 안의 7만큼도 따라 웃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세미 히키코모리 탈출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