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아빠. 아빠는 꼭 그렇게 얘기하곤 하더라. 자기가 소리 지르는 모습에 더 화나고, 내게 손찌검하는 순간 더 속상해서 날뛰게 된다고. 그렇게 이성을 잃은 아빠는 어떠한 대화도 통하지 않았어.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지난 뒤 이성을 되찾은 아빠는 미안한 마음에 더 잘해주곤 했어. 내 온몸에 피멍 들게 했던 초등학생 시절 어느 날에도. 눈에 시퍼런 멍이 든 것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고 얘기하더니 에버랜드에 데려가줬지. 멍이 욱신대도록 신나게 웃었던 기억이 나. 어쨌든 그 순간엔 폭력이 멈췄고 놀이기구는 재밌었으니까.
혹시 기억나? 내 생일선물을 고르는 게 너무 어렵다며 용돈으로 주겠다고 얘기할 때마다 나는 그건 마음이 담겨있지 않다며 싫어했던 거. 돈은 필요 없으니 고심 끝에 고른 선물을 달라했었잖아. 아빠는 그럴 때마다 '넌 꼭 그렇게 말하더라.'라며 웃곤 했어.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아직도 다 크지 못한 어린아이인 걸까. 더 이상 아빠에게 너무 가깝게 다가가지 않고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며 상처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더라. 진심 어린 애정과 인정이 고프더라. 아빠에게 허심탄회한 개인사를 털어놓은 한 달 전쯤, 세 시간 반동안 쏟아낸 인격모독과 욕설, 고함을 포함한 마음 갈가리 찢는 말들 구석구석 기억해. 아마 앞으로 몇십 년은 간직하게 될 것 같아. 실은 평생. 그런 뒤 오랜만에 만난 며칠 전 내게 두둑한 용돈을 쥐어주더라. 밥 안 먹어도 든든한 게 주머니 속 현금이라면서. 아빠는 내게 쏟아냈던 말들에 실수가 있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빠. 난 돈 필요 없어. 대신에 꼭 받고 싶은 선물은 있어. 그동안 내게 했던 말과 행동에 어떤 부분은 실수였으니 사과한다고 말해주면 안 될까? 어느 부분은 진심 어린 아픈 조언이었으나 이 부분까지 마음에 담고 상처받진 말라며 미안하다고 말해주면 안 돼? 내게 필요한 건 아빠의 말 한마디인데. 그거면 나 더 당당하고 밝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실수할 수 있잖아. 아빠도 틀릴 수 있는 거잖아. 항상 정답일 필요도, 그럴 수도 없는 건데, 아빠는 유난히 틀림에 겁이 많은 것 같아.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서 스물여섯 살에 나를 낳으며 무른 손으로 세상과 맞서느라 다급하게 책임감이 강해진 탓이었을까. 언제까지 내가 아빠를 이해해야 되나 외로운 세월이 길었는데, 앞으로도 내가 계속 이해하려 노력할게. 그러니 나 정말 힘들 때라도 단 한 번만 진심 어린 사과와 응원해 주면 안 될까. 아직도 내게 밥 안 먹어도 든든한 건 주머니 속 현금이 아닌 진심 어린 마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