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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람 Jan 26. 2024

생존자의 안부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주 1회 받아온 심리 상담을 2주 1회로 줄였습니다. 가장 아팠던 가정폭력 기억이 말끔히 지워졌다거나,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어져서는 아닙니다. 이전 곪고 벌어진 상처가 어느새 훨씬 가볍고 덜 괴로운 흉터가 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덫날 수도 있고,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을 흉터이지만. 더 이상 다급하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진 않게 됐습니다.


안부를 묻던 지인이 말했습니다. 언제나 열심히 살고 있는 절 보며 힘을 얻는다고요. 무엇인가 열심히 해내고 성장하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말했습니다. 잘 지내는 모습이 기특하다고요. 맞아요, 감사하게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재미있게요. 인생 본질이 윤택하고 행복하기만 해서 잘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돌봤습니다. 누군가 '행복해서 웃느냐, 웃어서 행복하냐'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고르겠습니다. 인생살이 언제나 무탄 하고 즐거울 수 없음을 나이 들어가며 실감합니다. 덜 행복하고, 가끔 불행할 때에도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힘을 기르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방법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서툰 어른으로서 오늘도 부단히 저를 돌보고 있습니다.




심리학스터디를 진행하며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고민 한 가지를 가져와주시길 바랍니다. 구체적일수록 수월합니다. 준비가 됐다면, 오늘 밤 당신이 잠든 사이 기적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바로 당신이 고른 고민이 해결됐다는 기적말입니다. 당신은 잠들어있었기에 기적이 일어난 지 모릅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난 당신은 어떠한 것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확인하고서야 그 고민이 해결됐음을 알지 생각해 봅시다."

생소한 질문이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내 엄마에 대한 애착, 집착이 고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엄마가 내게 전화와 문자 연락이 없어도 서운하지 않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고 알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보다 엄마가 날 생각하는 정도가 가벼운 것에 상처받지 않게 됐다면. 나 없이 동생과 엄마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엄마가 독립한 내게 먼저 만나자고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던 것이 서운하지 않는다면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 것이라고요.


해결중심치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때 대부분 기적을 '로또 당첨, 완치'등 대단한 것을 고르기보단 훨씬 별것 아닌 기적을 답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와 갈등이 심한 남편에게 위 질문을 할 경우 '퇴근했을 때 아내가 제게 한 번만 된장찌개를 끓여줬으면 좋겠습니다.'라 대답하는 식이라고 합니다. 내담자 문제 외의 것에 집중하게 하며, 문제로 인해 그간 해내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치료방식이었습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내담자가 '남편과 갈등이 심해요.'라 할 경우 '갈등이 왜 심해졌어요?'라 묻는 것이 아닌, 남편과 문제가 없더라면 함께 하고 싶었던 행위들을 묻는 방식이었습니다. '매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는 것이었어요.'라 할 경우 해결 방법은 그저 부부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는 것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너무나 짧고 얕은 스터디 내용이었기에 근원부터 차근차근 익히진 못할 내용이었습니다만, 제겐 획기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분명 이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민들도 많겠지만, 제 경우엔 이 이론을 듣고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습니다. 자기 합리와의 일부이겠습니다만, 스스로를 편안하게 할 방법 중 하나로 합리화를 활용하는 것도 필요한 부분 존재함을 압니다. 가정폭력 또한 일부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총 동원하고서도 마음이 무거운 부분이 있습니다.


독립을 하더라도 가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을 듣지 못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나보다 훨씬 긴 삶을 살아온 그들은 변화하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자식에게 본인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울 존재이고요. 그들의 나약함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전 그들보다 훨씬 강인하니까요. 그들이 해내지 못한 사랑을 제가 채우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삶 속 가장 큰 수치를 기억하는 목격자. 저를 두려워하는 그들의 불안정한 내면을요.


엄마, 아빠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습니다. 위 이론을 접할 때 말했듯, 엄마가 연락이 없어도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네. 제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서운해하지 않자 엄마가 용서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서운함, 미련, 억울함의 감정 또한 그들이 제게 남긴 잔흔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들을 한편에 치운 채 제 삶을 재미있게 살아가기에도 벅찹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엄마, 아빠는 요즘 사는 것이 보기 좋다고 합니다. 그들과 따스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전엔 불가능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벅찹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 사람들을 겁내고,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먼발치에서 바라본 뒤 헤어지길 반복했던 성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릴 적의 전,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중첩돼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람을 그리워한 밤을 기억합니다. 이젠 어느 모임에 가도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심지어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순간도 찾아왔습니다. '정말 외향적이시네요.'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회화된 내향인이라 그렇습니다.'하고 허허 웃으며 넘기지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 뭉클합니다.  


요즘 들어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정말 두려웠습니다. 이전 직장생활을 하며 공황장애, 우울감을 경험했기에 수 없이 고민하고 주저했습니다. 동시에 궁금했습니다. 직장생활 부분을 제외하면 많은 부분 변화한 것이 느껴지는데, 과연 직장생활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을지요. 때문에 스스로를 면밀히 관찰하며 입사를 했습니다. 아직까진 너무나 즐겁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과도 밝게 잘 지내며, 업무 스트레스도 이전처럼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영장에 발이 닿을지 긴장을 하며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다행히 발은 안정적이게 지면에 도착했고, 절 단단히 지지해 줬습니다. 생경하며,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직장얘기가 나와서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자면, 구직 당시 고려한 부분이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사람 관계를 어려워 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해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된 것 또한 기적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역시 우리 집 식구들은 다 사람을 좋아해."라 말했습니다. 맞아요. 전 틀림없이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마음 놓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요. 그 기간의 구석구석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스스로이기에 참 뭉클했습니다.


누군가에겐 일상의 순간이 제겐 감동의 찰나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보다 세상에 늦게 나왔습니다. 올해 들어 세 살이 됐거든요. 가정폭력생존자로서, 잔상에서 벗어나 살게 된 세월입니다. 그만큼 신기하고 새롭고, 즐겁습니다. 남들은 여태 이런 세상을, 이렇게 살아왔구나 싶습니다. 앞으론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기대됩니다. 언뜻 흉터가 아려오는 순간은 있습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욱신거림이 심해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마음 놓고 아파하고 스스로를 충분히 어루어만져주겠습니다. 그렇게 더 나아가겠지요.


앞으로도 서툴게 살아가겠습니다. 많이 웃고 울고 달리고 넘어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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