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에 다시 읽는 <모순>
언니 이 책 재밌어?
드라마 보는 것 같아. 한 번은 읽어볼 만 해.
대학생이 된 언니는 아침 수업이 없는 날이면 엄마와 함께 일일 아침드라마를 챙겨보곤 했다. 한결같이 유치하고 뻔한 결말인데 왜 보냐는 나의 물음에 또 안 보면 서운하다는 게 언니의 대답이었다. 그 옆에서 엄마는 늘 ‘저런 쌔래 패 죽일 놈’이라 뇌까리며 왜 매일 아침 일일연속극을 사수하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본인이 봤던 드라마나 소설 얘기를 내게 들려주기 좋아했던 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고 (그런 언니는 훗날 국어교사가 되었고 한 번도 언니의 수업을 들어본 적은 없으나 언니의 고전문학 시간은 분명 지루하지 않으리라 장담한다) 비록 언니가 드라마같은 소설이라고 표현했지만 언니가 들려준 이 책은 분명 아침 드라마처럼 안 보면 서운할 책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소설이나 드라마의 허구가 싫어서 시와 수필만을 읽었던 이십 대를 보냈기에 책장 어딘가에 한참을 꽂아두었다가 이 책을 펼쳐보았을 거다. 아마 그 당시 소설책을 즐겨 읽었던 국문과 지혜의 추천이 있었을지도.
언니가 이미 우리 상황에 빗대어, 가령 엄마보다 잘 사는 이모네 이야기라던지, 억척스러운 진진이네 엄마를 당시 유행하던 아침드라마 속 배우 김혜숙으로 빗대어 표현한다던지 무척 소상히 이야기를 들려주었기에 결말을 궁금해 하며 읽지는 않았다. 다만 성인이 되어 읽게 된 소설책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문 어떤 문장이 이 책에 있다는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철이 없게도 그 당시 책을 덮을때 즈음 나는 김장우에게 마음이 기울었음을, 이제와 부끄럽게 고개를 떨구고 애꿎은 손톱 옆 거스러미를 떼내며 고백해 본다. 이 고백이 왜 무람한지는 미혼일 때와 기혼일 때 극명하게 갈릴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은 주변 기혼자들의 질책의 회초리는 매서울 수 있으니 말을 아끼겠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십 년 이상 살다 보니, 지금은 김장우도 나영규도 다 싫다. 애석하지만 세상에 오직 이 두 남자만 있고 내가 꼭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지금은 김장우와 연애하고 결혼은 나영규와 하겠다고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는 내가 되어있더라.
이처럼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때론 속수무책인 상태로 시린 바람이 가슴 한 켠을 관통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그 이후로 더 많은 소설책을 읽고 삶과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으나 소설책 밖으로 튕겨져 나온 나는 사랑에 치열할 필요가 없었음을, 그 시간에 나의 안녕과 복지에 힘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고해해 본다. 현실에서는 적당히 사랑하다 적당히 잘 사는 사람들을 더 많이 봐왔으니까. 말장난 같지만 그의 안녕을 바라며 나는 안녕하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안녕”하고 헤어졌으니까.
삶은 늘 우리의 의지를 조소하듯 저 먼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곤 한다.
언니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나영규 같은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는데 맞선 자리에서 나영규 갑은 이래서 싫고 나영규 을은 저래서 싫고 하다 결국은 김장우 같은 사람과 결혼을 했다. 엄마는 이제 형부 이야기만 나오면 일일 연속극 남자 주인공의 패악질을 듣듯 쌔래 패 죽일 놈이라고 힘없이 혼잣말을 하시곤 한다.
결혼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나는 꼭 이건 있어야 해 보다 이것만 아니면 돼 의 마음으로 상대를 선택했다. 그래서 결국 김장우같은 감성도 나영규같은 계획도 없는 어떤 사내를... 기대하고 애쓰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내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여타의 선택지가 없던 그때의 상황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와의 결말이 해피 엔딩인지 새드 엔딩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지루한 독립영화의 중반에 들어섰고 나는 입장료가 아까워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지 속 편히 졸다 나올지 고민하다 결국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모호한 그 결말에 뭐래 하고 허탈해할 공산이 크겠지. 다만 한 가지 위로가 된다면 감동도 재미도 없었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영화관 안은 훈훈했다는 것, 밖이 낮인지 밤인지 모른 채 내가 시간을 보냈다는 것. 거리는 한창 영하의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일몰의 시간인데 말이다.
“해 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양귀자, <모순> 가운데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었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