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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18. 2023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별거 아니야. 아닐걸?

퇴사한 지 이틀 차. 따끈따끈한 백수가 되었다.


 퇴사를 생각할 당시, 다시 소속감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고민을 했더랬다. 그러니까 작년 겨울, 나의 첫 직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스튜디오와 얽히며 생긴 아주 기나긴 이야기.


 사랑하던 공간을 박차고 나오면서 주변인들의 걱정과 응원을 등에 업고 성수동으로 향했다. 출퇴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나 이상을 좇을 수는 없는 법. 일주일 정도 기존 직원들과 합을 맞췄고, 공식 첫 출근으로 약속한 날이 되어 들뜬 마음으로 새 둥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도착했다. 그렇게 한 시간, 약속된 출근 시간을 그 누구도 지키지 않았다.

 첫마디는 “같이 일하기 어려울 것 같다.”였다. 나는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당한 상황일수록 절대로 앞에서 울지 않겠다는 다소 고리타분한 아집이 있는 사람으로, 차분한 척 대화를 이어갔다. 어떠한 이유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걸 왜 이제야 말씀하시는 건지. 덕분에 떠나온 둥지에 대한 부채감이 더 늘어버렸다고 탓하고 싶었다. 대답인지 변명인지 모를 것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최대한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대화를 대충 정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씨씨티비가 있는지 확인 후 골목으로 돌아서자마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소리 내서 우는  오랜만이었다. 다음  전화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서술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불호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뚜렷한 불호는 손에 꼽는다. 확실하게 말할  있는 , 오해받는 상황은 감히 최악이라고 말할 만큼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이다.


 일상으로 돌아왔으나 전과 같을 수 없었고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나는 시간 속에 켜켜이. 가능하다면 바닥이 어딘지 알고 싶을 정도로 매일 끝없이 추락했다. 일상이 무엇이더라, 그러니까 평소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더라. 어떻게 해야 나를 둘러싼 막연한 공포와 멀어질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흐르면서 영원히 멈춰버렸다.

 불안함은 나를 좀먹고 더 크게 덩치를 키워 삼키고 있었다. 소화되기 전에 벗어나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짓눌린 채로 기다리는 것뿐. 그것을 깨닫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정확히는 모든 것이 종결된 지금에서야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기억이란 참으로 잔인하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건 쉽게 휘발되면서 잊고 싶은 건 절대 스스로 왜곡되지도, 지워지지도 않는다. 나에겐 기어코 각색시키는 버릇이 있지만 원본을 완벽히 지우진 못한다. 지나간 시간이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으니, 마음을 나누고 싶은 누군가에게. 간혹 찾아올 그런 기회에 보여주기 위한 작은 여지를 남겨둔다.


 내면을 들여다보지 말아야 했다. 생각하지 않는 법을 몰랐던 나는 하루에 산책을 3시간씩 하고, 밤낮없이 밖에 나가 자전거를 타거나, 취미 중 하나인 마트 구경을 하며 군중 속에 섞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럴수록 공허해졌다. 혼자인 게 더욱 실감됐다. 희미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그때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해가 온전히 뜬 낮이 되어서야 겨우 선잠을 자곤 했다.


 하루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다 속이 메스꺼워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숨이 막히더니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삽시간에 나를 옥죄어 왔다. 그게 전부였다. 죽음이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면서 죽는 기분을 느꼈다. 창문을 열고 밭은 숨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십분 넘게 숨을 헐떡이다 조금 잦아들었을 때, 진정시켜 줄 누군가를 떠올렸다. 오랜만의 연락에 울면서 숨을 토해내도 아무렇지 않을 누군가가 제발 받기를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웃기게도 당시 만나던 친구는 후보군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 연애는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는 "어. 그래. 제로야, 괜찮아. 어디야?"라고 답했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을 토해냈다.

 공황장애. 뉴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던 단어였으나, 정확히 어떤 건지 모호하게 느낌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항상 궁금했는데. 직접 겪어볼 생각까진 없었지만. 그 이후로 예기불안은 마치 동반자처럼 내 곁을 지켰다. 한동안은 산책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내가 제3자가 되는 이상한 경험을 자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쓰러질 것 같은 걸 매번 쪼그려 앉아서 버텼다. 누군가 OFF를 누른 것 마냥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시야가 엉망이 되곤 했다. 그 순간과 그나마 비슷한 느낌을 찾자면 기립성저혈압. 재빠르게 쪼그려 앉아야 하는 것도, 나를 괴롭히는 것도 비슷하다.


 전부 정리하고 본가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내 자신을 믿었고(믿어야만 했고), 본가에 가면 완전히 무너질 거라는 판단이었다. 답답함에 제 발로 뛰쳐나온 곳이었으니까.

 그 시점에 요가를 시작했다. 당시 유일하게 불안으로부터 멀어지는 시간이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사랑하던 곳으로 복귀도 할 수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나를 곁에 두고 지켜주려 노력했다. 덕분에, 정말로 나는 그녀를 비롯한 주변인들 덕분에. 실컷 불안해하며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수도 없이 들켰다.

 

 병원에도 가봤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 혼자 주절거리다 펑펑 울고 머쓱해진 채로 나와 호명을 기다렸다.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검사도 받았다. 결과지엔 망가진 메트로놈 마냥 불안의 극단에 내가 멈춰 서있었다. 부교감신경이 작동을 안 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약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부작용이 무서웠고, 최소 6개월은 복용해야 하며, 단약이 어렵다는 점은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스스로 이겨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게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앞서 말했듯 오롯이 기다렸다. 완전히 멈춰 버린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를.


  ‘괜찮아지고 있나 봐.’라고 생각했을 때는 공원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반년쯤 지났다. 더 이상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시점이었다. 수백 번을 되뇌었다. ‘몇 주간의 기억을 없애주세요.’라든지, '일어났을 때 내년이면 좋겠다.’ 같은 허무맹랑한 바람과 '그냥 눈뜨기 싫어.'와 같은 주변인들이 슬퍼할 생각 따위를. 잠에 들기까지 계속해서 반복했다.


 말하다 보면 장황해지는 습관이 있다. 당시엔 사소한 오해가 시발점이었을 뿐이지, 그 외에도 다양한 슬픔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에게 발생했었다. 인생에 있어서 크고 작은 풍파는 언제든 찾아온다. 보통 겪어 본 일이라면 조금 더 수월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겪었던 상황이라고 가정할 수 있나? 비슷할 수는 있지만 면밀히 따져보자면 똑같은 점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번 상황은 내가 선택한 결과라는 점부터 출발선이 다르다. 그렇다면 전처럼 '똑같이' 불안해할 이유는 없다.


 여기까지 작성하는 시점의 나는 백수가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글을 올리는 지금은 가을의 초입에 들어섰다. 가볍게 쓰려던 글이 어쩌다 보니 오랜 시간에 걸쳐 쓰게 되었다. 다양한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곁에는 나를 지탱해 주는 부쩍 가까워진 이들이 있고, 고대하던 마지막 달 월급도 들어왔다. 한 달을 불태운 보람이 있다 싶은 금액이었다. 이 글을 마무리하던 날, 그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두 달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함께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하며, 나는 이 글을 수십 번째 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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