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에 산책합니다

생각 비워내기

by 기정

집 근처에 잘 조성된 호수 공원이 있다. 물 가까이에 사는 것이 사주팔자에 좋다는 철학원 선생님의 말을 가슴속에 새겨놓은지 어언 4년, 기어코 물 근처로 집터를 잡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호수 공원을 산책했던 기억은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빼고는 거의 없는 듯했다.


걸어볼까


처음에는 무작정 이었다. 동네 음식점에서 끼니를 해결한 후 소화시킬 겸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퇴근

후 옷차림인지라 걷기 좋은 신발은 아니었다. 주말에는 슬리퍼 신고 편의점에 들른 김에 공원을 걸었다. 운동복을 차려입은 다양한 사람들이 뛰거나 걷거나 대화하며 스쳐 지나가곤 했는데,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싶으면서 나도 ‘열심히’ 집단에 소속된 것 같아 한편으로 뿌듯했다. 뜨문뜨문 산책을 즐긴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걷기에 최적화되지 않은 신발 탓인지 영 시원찮은 발목 탓인지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한동안 집에서 요양을 하며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걷기 위한 준비


갖춰 입은 운동복과 러닝화가 멋져 보인적이 있다. 유명 브랜드의 제품으로 풀착장한 러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 전, 헬스장 회원권을 끊고 여러 브랜드의 운동복을 장만했었으나 장롱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이번에는 별도의(지출이 있는) 장비는 갖추지 않기로 했다. 그저 신발장에 있는 묵혀둔 러닝화 중 하나를 신고는 산책에 나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단화나 슬리퍼를 신고 걸을 때보다 발이 편안했다. 발이 편안하니 오래 걸을 수 있었다. 오래 걸으니 잡생각이 났고,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다 결국 에이, 몰라! 하고 생각을 그쳐버리게 되곤 했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산책을 시작하는 시간대는 보통 22시에서 23시 사이로 늦은 편인데, 60분 정도를 걸으면 약 7,000보가 채워진다. 활동이 거의 없는 주말에 1만보를 채우기 위해선 약 90분을 걸어야 했다. 이렇게 1만보의 기준을 세우게 된 계기는 별 것 없는데 흔히들 ‘건강 = 매일 1만 보 걷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만 보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 ‘1만보를 채워야 한다‘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산책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생각을 비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 비워내기


호수 공원의 초입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에너지가 가장 넘치는 걸 느낀다. 주변 사람들이 뛰건, 걷건 구르건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걷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걷다 보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잘 조성된 산책로가 예쁘다던가, 짙은 녹색의 식물들이 무성히도 자랐다던가, 달이 예쁘다던가. 저기 저 높은 아파트는 얼마일까 하는 생각에서 직장에서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이나 최근 겪고 있는 골칫거리들이 머릿속에 침범해 주변 풍경을 지우기도 한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새 에너지는 소비되고 진이 빠져버리는데 나는 그 상태를 애정한다. 머릿속이 텅 비워지는 상태가 될 때까지 걸으면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그때 1만보를 걸었느냐 7,000보를 걸었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생각이 비워지면 나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내면의 상태가 된다. 비워진 공간에 어떤 생각을 채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