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산다고 했을 때, 겨울만 되면 들려오는(온라인에서 보이는) 말이 있다.
"크리스마스 마켓 예쁘잖아! 너무 좋겠다."
그렇다. 크리스마스마켓은 예뻤다. 딱 4년 차까지.
독일거주 초기 4년은 매년 마켓에 갔던 것 같다. 도시 불문, 기차랑 버스를 타고서라도 마켓을 보겠다고 추위를 뚫고 글뤼바인(겨울에 데워마시는 달달한 레드와인)을 마시러 다녔다. 그러다 5년 차가 되던 해 강력한 크태기가 찾아왔고, 마켓 지붕 끝의 장식만 봐도 다른 길로 돌아갈 정도로 마켓이 싫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다. 이미 볼만큼 본 데다 추위를 뚫고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돈 쓰고 술 한잔 먹는 것이니, 집에서 따뜻한 담요 덮고 귤 까먹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1n연차인 현재, 다시 마켓구경이나 가볼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전에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갔다면 이제는 가서 분위기보고 컵이나 사 오자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사용되는 컵의 디자인은 도시마다, 해마다 달라서 소장가치가 있다). 마침 곧 출장으로 함부르크에 갈 일정이 있어서 마켓에 들러 핫초코를 마시고 컵을 가져오리라는 다짐을 했다. 게다가 함부르크의 마켓은 개인적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예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부르크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역시 독일에서 제일 변덕스러운 날씨답게 얼굴에 분무기를 뿌리는 것 같은 비와 추위가 함께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켓에 갈 마음이 싹 사라졌고,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따뜻한 국물 먹고 싶다.’
한국에서 비 오는 날엔 갓 부친 파전을, 추운 날엔 뜨끈한 국밥을 먹었던 유전자가 되살아난 걸까. 눈앞에 펼쳐진 마켓도, 다른 어떤 음식들도 나를 막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길로 아시아 식당으로 직행해서 메뉴판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완탕국수 한 그릇 주세요. 국물 많이요."
참고로 나는 독일에서 혼밥을 잘한다.
음식 맛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일인지라, 정말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길 때 안 먹으면 하루 혹은 한주 내내 기분이 안 좋기 때문이다. 이 날, 나는 혼자였고 식당은 붐볐지만 신경 쓰지 않고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따뜻한 국물과 정성스레 빚어진 훈툰이 어떤 일행보다 더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국수를 다 먹고 마켓에 갔느냐?고 물으신다면 가지 않았다. 마켓에서 쓸 돈을 국수에 쓰기도 했고, 집 주방 찬장에 쌓인 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굳이 그거 받으려고 북독일의 독한 추위를 뼈에 새기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나는 호텔로 돌아왔고, 손에 남은 소득은 없었지만 그 어떤 마켓을 방문한 것보다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제목 및 본문 사진출처: 직접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