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사시는 혹은 다녀온 분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왜 독일에는 ㅇㅇ가 없어요? 이렇게 편한데."
'ㅇㅇ'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단어의 예시는 비데, 디지털 도어락, 음식물처리기 등이 있다. 물건 종류에 따라 독일에서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조금씩 다르지만(예를 들어 도어락은 디지털 기기에 대한 불신, 비데는 낮은 수요 및 물사용 때문), 독일에 전반적으로 일상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해주는 물건이 적은 이유를 나는 조금 다른 곳에서 찾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고지식하기 때문'이다. 고지식이란 말은 부정적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좀 포장해서 '정직하다(실제 도덕성과 관계없음)'고 해보자. 즉, 독일인들은 물건을 참 정직하게 쓴다. 가만히 관찰해 보면 이런저런 물건은 많은데 이상하게 그 도구들을 써도 편리하단 느낌이 없다.
예를 들어,
- 퀄리티 좋은 가위로 종이나 비닐봉지만 자른다. 고기나 국수 같은 먹거리를 자를 생각을 왜 못하는 걸까?
- 숟가락으로 수프류만 떠먹는다. 숟가락 단면으로 타르트와 같은 케이크 자를 생각을 왜 못하는 걸까?
- 세탁소에서 준 옷걸이를 버린다. 조금 구부려서 옷의 먼지나 겨울점퍼 관리에 쓸 생각을 왜 못하는 걸까?
만약 한국인이 "가위는 종이 자를 때만 써야지. 고기는 고기칼로 써는 거야."라고 하면 "고지식하기 짝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거다. 독일에선 가위로 고기를 썰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그들이 이처럼 지독할 정도로 물건을 정직하게 정해진 용도로만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극도의 안전과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가위를 예로 들면, 혹시라도 가위를 다른 용도로 썼다가 위험할 수도 있고, 이미 고기를 썰라고 만들어진 칼이라는 도구가 있으므로 가위를 사용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어락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열쇠라는 용도에 맞는 확실한 물건이 있는데 괜히 새로운 걸 썼다가 비밀번호가 털릴 수도 있고, 고장 나서 열지 못할 경우 난감해질 일이 겁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특정 용도를 위해 개발되었으므로 모든 물건을 그 용도에만 맞게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처럼 고지식한(정직한) 그들의 특징은 체계적이고 질서 잡힌 사회를 만드는 데 밑바탕이 되었을지 모르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고의 경직화, 융통성 부족 그리고 변화를 싫어하는 상태를 만들어냈고 그게 바로 지금의 독일 그 자체다.
최근 젊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아시아엔 있는데 왜 우리나라엔 없어?"라며 비데와 같이 각종 편리한 물건들을 SNS에서 소개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이민자 수용 및 외국인 비율이라면 둘째 가기로 서러운 독일이지만 여태까진 '살기 좋은 우리나라가 살기 어려운 너희를 받아준다'는 태도가 두드러졌지, 지금처럼 다른 나라의 일상을 공유하고 독일에 여전히 개선할 부분이 많다는 점을 인정한 건 비교적 최근일이다.
내가 처음 독일에 왔던 십 수년 전만 해도 한국에 귤이 있는지, 눈은 내리는지, 아파트 난방은 되는지 물으며 은근히 독일을 칭송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내게 먼저 와서 묻는다. 먹방이 뭐냐고, K-드라마를 봤는데 너도 봤냐고, 인스타에서 한국릴스를 봤는데 이렇게 편리한 게 실제로 존재하냐고.
국뽕을 부리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는 한참 전부터 있었고, 사용해 왔고, 실제 생활 모습이니까. 독일도 이젠 모든 생활 전반에 사고의 전환과 융통성이 필요한 시기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