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장기거주하며 가장 많이 한 생각 중 하나, 선진국이란 과연 무엇일까.
실제로 이곳에 살기 전과 10년도 훌쩍 넘은 지금 나는 '선진국'의 정의를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선진국에 대한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선진국=편리함]이라는 공식이다.
선진국이니까 한국보다 빠르겠지(혹은 비슷하겠지), 더 좋은 기술이 있겠지, 물건이 더 튼튼하겠지, 사람들이 예의 바르고 책임감있고 신사적이겠지 등등. 이 모든 것은 크나큰 착각이며 실제로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아주 쉬운 예시로, 한국의 택배가 무려 '로켓'이라는 이름을 달고 0.5일 만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하는 동안, 독일의 택배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택배비는 한화 1만 원에 육박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최소 3-4일이 걸리며, 담당 기사가 귀찮으면 모르는 동네나 남의 집에 주고 가버리고, 분실되는 것도 부지기수다. 한국의 현관문은 디지털 도어락, 지문인식, 심지어 홍채인식으로 진화했지만 이곳은 여전히 무거운 열쇠꾸러미를 들고 다닌다. 열쇠가 안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디지털을 불신하고 변화에 극도로 보수적이기 때문이다(도둑은 최신 열쇠도 5분 만에 딴다). 직장생활이나 행정처리를 해보면 책임을 극도로 회피하고 남에게 떠넘기는 기술, 아예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기술이 하루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책임감, 예의, 염치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자기 앞으로 일이 안 떨어지는 것만 중요한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길에서 부딪혔을 때 사과하고, 문을 잡아주고, 미소 짓는다고 해서 반드시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건 아니다.
실제로 선진국이라는 구분은 GDP, 사회보장제도, 법치 수준 등을 기준으로 나눌 뿐, 실제 생활의 편리성이나 사람들의 인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게다가 이 용어는 본질적으로 서구 중심 시각에서 나온 말이라, 그들의 시각에선 '선진적'일 수 있으나, 다른 문화권에서 보기엔 오히려 후진적일 수 있다.
유럽만 달랑 놓고 보면 독일은 타국가들 대비 꽤 정돈된 나라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전 세계적 기준으로는 의외로 다방면에서 수준이 상당히 떨어진다. 근거 없는 비난이 아니라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디지털 행정은 매달 한 번 이상 기술적 결함으로 업무를 못할 정도로 온라인 시스템 오류가 잦다. 회사 담당자는 수시로 자리를 비우고, 공공기관의 대응은 매우 느리며, 무책임하게 잘못된 처리를 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내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도 동일한 법조항을 두고 세 명의 직원이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이렇다 보니 스탠다드 시스템이 아니라 케바케/사바사 행정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독일에 살아본 본 사람(여행 아닌 정식 거주)은 알겠지만, 은근한 인종차별과 관료주의 역시 선진적이라 부르기엔 부끄러운 점이 많다. 지나가다가 니하오, 칭챙총, 눈 찢기 이런 노골적이고 수준 낮은 차별이 아니라(그런 차별은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고, 무리에서 배제시키고, 유럽인들과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고, 유럽인에겐 하지 않는 푸대접을 하거나, 사람 몰아부치기, 능력을 깎아내리는 등의 차별을 말한다. 즉,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독일 및 유럽에 고정되어 있으며 그게 마치 이 사회처럼 잘 변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변화하지 않는 게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선진국이란 타이틀엔 안 어울린다는 말이다.
복지시스템 역시 선진국이라는 간판을 얻는 데 한몫했겠지만, 실제로 내는 돈에 비해 받는 서비스는 상당히 미흡하다. 매달 소득의 약 16프로(고용주 근로자 반씩 부담) 공공 의료보험에 지불하는데도 아플 때 바로 병원 가기 어렵다. 그나마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곳이 가정의 인데, 대부분의 가정의에서는 진통제나 차를 처방한다. 물론 당장 죽을 정도의 증상이면 응급실에 가서 긴급 수술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지경까지는 빠르게 전문의를 만나기 어렵다. 죽기 직전에 수술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걸 복지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리 병원에 갔더라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던 가능성은?
결국 선진국/후진국이라는 이분법적 분류는 구시대적 표현이다. 차별과 편 가르기는 싫어하면서, 가장 복합적이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국가를 단 두 단어로 분류하는 건 모순적이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 자체로 봐야 하며,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가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직접 살면서 그 사회에 깊이 들어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 그게 바로 진짜 현지에서의 삶이고, 그 나라의 진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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