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해외거주가 더이상 특별한 일이 아닌 요즘이지만, 여전히 "유럽"하면 낭만 가득하고, 아름다우며, 사람들이 신사적이고, 무엇보다 고용 안정성이 좋고, 일하기 좋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게다가 (적어도 국내에선) 독일의 이미지가 특히 좋기 때문에, 마치 독일이 이러한 유럽의 장점을 고루 다 갖춘 나라라는 '상당히 고평가된 측면'이 있다.
독일 장기 거주자로서, 유럽을 오래 봐온 사람으로서 항상 말하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 말도 안되는 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한국 못지않게 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밑도 끝도 없이 특정 국가를 찬양하고 올려치기 하는 사람을 굉장히 경계한다.
어쨌든 다른 부분은 몰라도, 여태까지 '독일 회사의 고용 안정성' 하나는 나름 인정할만 했다. 사기업이라도 무기한 계약(정규직)을 하면 직원이 일을 잘하든 못하든 해고가 굉장히 어렵고, 잘못했다간 소송전까지 갈 수도 있기에 회사가 직원을 자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직원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3개월~1년 가량의 텀을 두고 진행해왔다.
그런데 이런 독일이 변하고 있다.
하루 아침에, 그것도 출근한 지 몇 시간 만에 갑자기 사람을 불러 해고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남편과 종종 협업을 하던 동료였는데 영문도 모른 채 일어난 일이었다. 오전에 커피를 마시고 있던 중 인사과에서 그를 불렀고, 오후에 노트북을 반납하고 그길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외국인이자 한국인의 시선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 그 직원이 혹시 외국인이야? 아니, 이민배경 없는 독일인이었다.
- 그 직원 혹시 투잡이나 횡령같은 거 했어? 아니, 전혀 없었고 풀타임 정규직원이었다.
- 그 직원 혹시 누구랑 싸웠어? 아니,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고 한다.
인사과에서 그에게 전달한 해고 사유는 단순했다. "당신은 우리 팀과 맞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어느 누가 회사랑 팀이랑 업무랑 100% 딱 맞아서 일을 하는가? 어딘가 부족하고 어딘가 맘에 안들지만 버티고 다니는 것, 그게 직장생활이고 사회생활이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마 그 말을 한 인사과 직원 본인도 비슷할거다. 이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유로 해고를, 그것도 '독일에서', 그것도 '당일 통보'로 이루어졌다는 건 정말 심상치 않은 사건이다.
실제로 최근 독일 주요 기업들에선 대규모 구조조정과 인원 축소의 움직임이 나타나고있다. 우리에겐 '바이엘'로 알려진 글로벌 제약사 Bayer는 이미 2년 전부터 수 천명의 정규직을 해고하고 있으며, 올해까지 10000명이 넘는 인원을 감축할 계획이다. 독일 차 하면 떠오르는 '폭스바겐' 역시 2030년까지 약 35000명의 일자리를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한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의 감축은 결국 그 업계 및 연관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기업 및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이는 점점 심화되고 있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독일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있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규제가 극심하고, 변화에 매우 보수적이며, 관료적 행정절차를 고수하는 독일의 특징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은 말 그대로 규제의 나라다. 규제 안에 규제있고, 규제 안에 또 규제있다. 개인조차 일상에서 피부로 느껴질 정도인데, 기업은 말해 뭐할까. 게다가 변화에는 어찌나 보수적인지, 신중하다는 말로 감싸주기에도 지쳤다. 나름 유럽의 리더라는데 손꼽히는 빅테크 기업 하나 없는 걸 보면 말 다했다. 일단 디지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여 카메라 하나 다는 것 조차 도시락 싸들고 말리는 사람이 한트럭이다. 또한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다. 이 세가지를 합쳐보면, 어쩌면 독일이 계속 성장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한 사람의 해고를 '그 사람이 잘못했으니 나가면 그만'이라고 볼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식의 해고는 여태 독일에서 정말로 보기 드문 아니, 볼 수 없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개성과 사정을 존중하고, 근로자의 권리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여 직장인으로서는 살기 좋다는 독일의 명성이 과거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내리막이냐 방어냐 갈림길에 서있는 독일과 한 배를 탔다면,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당신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