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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Oct 30. 2023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종소리가 들린다고?

세상에 그런 건 없어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종소리가 들린다'라고. 


본인이 경험하지 않았대도, 종이 아니라 다른 게 울렸다 해도 대중적으로 인연을 만난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종이 울리기는커녕 잠이 왔고 그가 내 운명의 상대인 줄 조차 몰랐으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나와 남편의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첫 직장 병아리 신입시절에 만났다. 회사가 달랐으니 사내커플은 아니고 같은 도시 내에 살았으니 '시내커플'이었다. 지금 보면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걸어온 길은 상당히 유사했다. 둘 다 자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뒤, 우리가 만난 도시로 취직을 했다. 일 때문에 새 도시로 이사했으니 둘 다 친구도, 지인도 없었을 때다. (남편은 말 안 하면 모두가 한국인인 줄 아는 외국인이다)


나는 회사에 적응이 될 때쯤 페이스북을 통해 그 도시의 welcome newbie 모임에 참여했다. 세상 내향형인 내가 얼마나 사람과 수다가 그리웠으면 참여했을까 싶다. 그런 다수 익명의 모임 참여는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 모임은 매우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나이대도 20대부터 60대까지 무작위라 공감대도 없이 난감하던 찰나, 나와 비슷하게 생기고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는 아시아 남자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그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며칠 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따로 만나서 밥 먹자고.

퇴근 후 우리는 시내 태국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는 내가 있는 테이블로 와서 정중히 악수를 건네고 앉았다. 악수하자고 내미는 손에 흠칫했으나 그래도 이력서를 주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내 생에 가장 인상 깊었던 소개팅'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와의 첫 데이트는 한마디로 지루했다.

서로 그냥 사는 얘기 회사얘기만 나눴는데, 뭔가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특별히 개성 있다거나 굉장한 센스를 보인다거나 하는 그런 '이성으로서의 끌어당김'이 없었다. 이 사람이랑은 그냥 동네 친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뒤로 매일 아침 나에게 '잘 잤냐'는 안부를 물었다. 잘 잤으니까 답장을 하겠지..! 문자도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런데 한 5일쯤 지났을까, 나는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렇게 우린 다시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는 여전히 변한 것 없이 종종 지루한 얘기도 하고 종종 유머를 던졌지만, 그런 일관된 모습에서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독일에서 나와 같은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그는 앞으로도 직장생활을 하며, 승진도 하고, 좋은 사람 만나 가족도 꾸리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던 대답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꾸밈없는 게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 뒤, 우리는 더 자주 만나서 밥을 먹고 주말에는 공원을 걸었다. 술이나 담배를 비롯한 유흥을 하지 않는 우리의 데이트는 유치원 소풍만큼이나 건전했다. 얼마 뒤 관계를 묻는 내 물음에 자신을 남들한테 '네 남자친구'라고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사귀고 싶다는 얘기를 장황하게도 한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고, 첫 데이트 장소는 동물원이었다. 해가 화창한 주말, 과일과 간식을 싸서 동물원에 간 게 우리의 시작이다.




그때부터였을까. 그의 장점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일관성(나는 부지런함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무리 바빠도 청소와 씻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 청결함, 여가시간엔 운동과 취미를 즐기는 건전함, 낭비하지 않는 검소함, 그리고 모든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모습이 좋았다. 나는 남자가 데이트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게 싫다. 똑같은 직장인이고 누구든지 노동과 시간을 투자하여 번 돈은 소중한데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가의 선물을 바치고 비싼 데이트 비용을 내야 할 이유는 없다. 더치페이를 하거나 서로 번갈아가면서 밥을 사는 게 나에겐 맞는 방식이었고, 그가 그랬다. 


갓 대학원을 졸업한 신입사원에, 차도 없고 작은 원룸에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이런 면모들에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사람과 함께 가면 잔잔한 일상을 유지하며 나를 잃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걸. 물론 풍파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 풍파를 나와 이 사람이 헤쳐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보고 싶어졌다. 결혼한 지금까지도 그 판단이 맞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앞으로 어떤 풍파와 이벤트가 우리를 기다릴지 모르니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 해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며 당시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떤 종소리도, 울림도 없었다. 그저 내 안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은 '이 사람이 바로 네 옆에 평생 있을 친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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